나는 멋쟁이가 되었을지도 몰라
옷 쇼핑을 하다보면 이건 도대체 언제 입는건가 싶은 의문이 가는 아이템이 몇 가지 있다. 한 겨울에 입을 법한 두꺼운 니트 소재인데 팔은 댕강 잘라져 있는 반팔 니트나, 온 몸을 덮어 강추위를 막아주려는 듯 길이는 아주 긴데 정작 비나 눈을 맞으면 안되는 고오급 소재로 만든 캐시미어 롱코트.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 가격은 비싼데 밑창이 얇아 한두번 신고나면 닳아버리는 로퍼가 그랬다. 겨울이면 찬 공기를 (가끔은 눈보라를) 뚫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광역버스에 지하철까지 타고 출퇴근을 하는, 하루 8,000보는 거뜬히 채우는 뚜벅이 직장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런건 도대체 누가 입는거야?
그 의문을 풀게된 건 사회초년생 시절 월급을 받고 처음 코트를 사러 간 백화점 매장에서였다. 고정 수입이 없는 학생 시절에는 옷을 사러 가면 엄마의 1차 심사를 통과한 옷들만 몸에 걸쳐볼 수 있었다. 1차 심사 항목은 계절에 맞는 두께, 저렴해 보이지 않지만 비싸지 않은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합리적인 가격. 엄마는 수십 년간 쌓아온 소비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 보다는 실용성을 겸비한 옷을 골라주곤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직접 돈을 벌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알아서 1차 심사를 하고 내 맘에 드는 옷을 사겠다며 호기롭게 백화점으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초짜 심사위원의 어리숙함은 하루에만 수백명의 고객들을 마주쳤을 점원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동안은 엄마의 1차 심사에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을, 디자인은 훌륭하나 소재나 두께가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코트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걸쳐졌다. 이건 요즘 유행하는 시크한 트렌치코트 스타일, 저건 귀엽게 입을 수 있는 하프 코트 스타일.. 랩처럼 빠르게 귀에 꽂히는 점원들의 추천사를 들으며 매장에 나와있는 신상품 코트는 다 걸쳐봤다. 그러다 정체가 늘 궁금했던, 바닥에 끌릴만큼 길이가 긴 캐시미어 소재의 얇은 코트를 걸치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한 겨울에 이걸 입고 출근했다간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옷 끝이 바닥에 끌려 더러워지는 건 시간 문제고 무엇보다 버스타러 걸어가다가 얼어죽겠다 싶었다. 그래도 이렇게 입어보게 된것도 인연인데 이 옷의 정체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코트는 언제 입는거예요? 한겨울에 입기엔 얇은것 같은데요?
어리숙한 질문에 점원은 나에게 패션의 세계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런건 운전하는 분들이 입는거죠. 차 있으신 분들.
그때 처음 알았다. 차가 있는 사람과 차가 없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한 겨울에도 운전자들의 체감 온도와 뚜벅이의 체감 온도는 달랐던 거구나. 그러고보니 운전을 하며 출퇴근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은 추위를 느끼는 순간이라곤 집을 나서서 주차장까지 우아하게 걸어가는 길이 전부겠구나. 겨울만 되면 패션과 추위를 맞바꾼채 겨울 교복, 검은색 롱패딩만을 입어야 하는 굴욕은 없겠구나.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안에서 추위도 피하고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어야만하는 직장인의 숙명도 피할 수 있는거였다.
운전대를 미리 잡았다면 나는 조금 더 멋쟁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