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無用)하다’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 여러 차례 모여 전략 회의를 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양껏 모아 기획안을 짜고 제출해 ‘좋다’는 긍정 평가를 들었다가 별안간 ‘우선순위가 그게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획안이 버려졌을 때. 결정은 나지 않고 대다수가 묵묵부답이다 결국 오더가 떨어지는 회의 자리가 반복될 때. 의견을 모으자고 만든 자리가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좁히지 못해 안 그래도 바쁜 업무는 밀리고 시간만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 때. 늘 속으로 하품 혹은 짜증과 함께 삼켰다.
오늘도 무용하구만.
노조를 만들던 초창기 내 원동력은 무용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바뀌었으면 하는 조직 문화가 있었고, 미디어 비정규직 문제에 연대하는 조직이 수년간 ‘몰라서’ 혹은 ‘운동하느라’ (고 믿어본다) 소홀히 해 곪은 상처가 있었다. 동료 활동가들이 자조하듯 풀어놓는 과거의 일은 노조로 보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열성적이었다.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받았을 때 그 오묘하게 번지던 기쁨도 여기서 나왔을 거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단체교섭에 참여하며 내 머리를 가장 아프게 한 건 기대만큼 말이 통하지 않은 사측도, 이견이 좁혀지기 쉽지 않은 조합원들의 입장도 아니었다. 암만 단체교섭을 해 봤자 무용할 수 있겠다는 내적 고민이었다. ‘할 수 있다’로 하냐 ‘할 수 없다’로 하냐, ‘합의’로 하냐 ‘협의’로 하냐, ‘노조의 동의를 얻냐’와 ‘노조에 통보하냐’로 밀고 당길 때 한 사측 교섭위원의 말이 강렬하게 박혔다. 완벽하게 복기는 안 되더라도 대충 이런 말이었다.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좋은 건 좋게, 상식선에서 언질하고 진행하자.
속으로 대답했다.
우리 상식이 달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슬펐다. 그 힘든 여정을 끝까지 해낸 노조위원장이 사직서를 내게 됐다고, 미안하지만 이해해달라고 했을 때는…. 조금 울었다. 노조를 만든 게 가장 무용하게 여겨졌다. 본인도 싫을 텐데 가장 입바른 소리를 해오고, 부딪치고 결국엔 (사측에) 불편한 동료가 되어버린 사람. 좋은 동료들과 오래 다녀보고 싶다고 싫은 것들을 떠맡은 사람이 떠날 때, 막상 노조가 힘이 되었나? 곱씹고 또 곱씹으며 생각했다. 우리 조직에 과연 노조는 유용한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생각은 답이 없다. 상념에 잠길 뿐이다. 그리고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외부에 의해 풀린다. 모 단체 활동가에게 DM이 날라왔다. 업무 이야기로 시작한 그는 조심스레 자신을 노조 지회장도 겸하고 있다며, 우리 노조 SNS를 잘 보고 있다고 응원한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자신들도 임금 협약을 진행하는 데 우리를 보며 힘을 얻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저 우리 이야기들 한풀이하듯 털어놓는 SNS를 보며 힘을 얻는다니, 조금은 놀랐고 퍽 기뻤다.
외부에서 내부가 되기도 했다. 최근 조직에서 신입 활동가를 채용했다. 단체교섭으로 얻어낸 성과이자 노조의 추천으로 활동가 인사위원으로 발탁돼 면접에 참여했다. 면접에 참여한 이들 중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기사를 읽었다’며 우리 단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이가 기억에 남는다. 얼마 후 동료가 된 한 활동가는 같이 길을 걷다가 말했다. 입사 전 우리의 브런치를 비롯해 SNS를 모두 보고 지원했다고. ‘그걸 보고도 들어오셨다니 대단한데요’ 웃는 내게 동료는 꽤 진지하게 말했다. 고됐을 과정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노동조합을 힘들여 만들고 여러 진보한 교섭안을 만들어줘 고맙다고, 이런 단체에서 일하게 돼 좋다고 말이다.
누군가가 흘려 보내온 말들 덕분에 상념을 벗어난다. 노조는 무용하지 않다. 우리의 지난 1년 7개월은 유용했고, 앞으로도 유용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2기를 맞이했고, 10명에서 시작해 5명으로 줄었던 노조 조합원은 7명으로 다시 늘었다. 2023년, 노조에 유용한 조합원으로 힘을 보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