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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yunion Sep 15. 2022

상상도 못한 거절 이유

저는 이걸 ‘도둑맞은 진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입사 초기 내 롤모델은 박상영 작가였다. 미국인처럼 아침 9시 정각에 출근하고 오후 6시가 되면 지체 없이 퇴근한다고 해서 회사에서 '마이클'이라고 불렸고,호시탐탐 퇴사를 노리고 글 쓰는 생활을 이어갔으며,​​ 회사 내의 직원들과는 거의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그의 글과 인터뷰를 보며 다짐했다. 나 역시 박상영 작가처럼 삶의 중심을 회사 안이 아닌 회사 밖에 두며 자아실현을 하겠다고.


(시민단체가 왜 회사냐, 활동가가 어떻게 노동자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엄연히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고 단체는 나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을 주고 있기에 이 단체는 사용자고 난 노동자다)


삶의 중심을 회사 밖에 두면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을 일이 별로 없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내 할 일에만 집중하고 동료들이 뭘 하든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나눠야 할 때만 다른 직원들과 소통했다. 사무실 내에서 누군가 혼이 나든 신이 나든 관심이 없었다. 점심시간은 당연히 혼자 보냈다. 누가 밥을 먹자고 하면 거절했고, 어느 날은 거절할 말을 찾기도 싫어서 사람들 몰래 나가곤 했다. 나는 박상영이니까! 내 인생의 기쁨은 회사 안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 찾을 거니까! 결국 회사를 박차고 나와 전업작가의 꿈을 이룬 박상영 작가처럼! 그렇게 박상영을 롤모델로 삼고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내가 3년이 지나 노조를 만들고 노조위원장이 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ㄴ(ㆍ.ㆍ)ㄱ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거절 이유를 들을 줄은. 내 예상 반박 시뮬레이션에선 들어본 적 없던 문장들이었다. 이 글은 상상력이 부족한 탓에 12번의 단체교섭을 하고도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해 조합원들에게 미안한 노조위원장의 변(辯)이다.




너도나도 다 비혼 선언하면 어떻게 하냐

전 연령대에서 미혼인구 비중이 늘고 있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노랫말처럼 결혼을 필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비혼 휴가를 주는 회사​​도 생기고 있다.

우리 노조도 요구했다. 단체협약에 비혼 휴가를 넣자고. 우리 회사는 사회와 국가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곳이니까. 결혼 유무를 묻거나 결혼 유무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랑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중앙일보 <반려동물 장례휴가, 비혼직원에 축하금…'복지 끝판왕' 이 회사> (2022.08.21.)



7시간 안에 가능한 업무를 8시간 동안 한 거냐
일을 덜 한다는 거냐

우리 노조도 안다. 시민단체는 재정 형편이 좋지 않다. 그래서 많은 단체들이 임금을 늘리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시간당 노동가치를 늘려주고 있다. (절대 뇌피셜이 아니다. 20개가 넘는 시민단체의 근로조건을 찾아서 정리했다) 노동시간이 감소했을 때 생산성이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나 실제 사례​​도 많다. 임금 인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걸 노동자들도 아니까 비슷한 규모의 다른 단체 사례도 참고해서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요구했다.

중앙일보 <하루 8시간 주4일제 실험…"사람 집중력 생각보다 짧더라"> (2022.09.12.)


동일노동의 정의가 뭐냐
현대차 같은 데서나 적용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지금은 자발적 비정규직(?)밖에 없지만 한때 우리 사업장에는 정규직 직원보다 더 많은 비정규직 직원들이 존재했다. 어떤 비정규직 직원은 정규직 직원과 똑같은 업무를 했다. 모니터보고서 초안을 쓰고, 방송용 대본을 썼으며, 기자회견이나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들은 월급이 아닌 시간급으로 계산된 임금을 받았고, 그렇기에 연휴가 많은 달에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수준의 임금을 받았다. 계약 종료 당일에야 계약 연장 여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1년 넘게 일했음에도 퇴직금을 받지 못할 뻔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일 축하도 받지 못했다. (정규직 직원들의 생일 때는 ‘공식적’ 생일잔치가 있어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축하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들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가 동료였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는 나와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용 유연화가 왜 나쁘냐
착취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비정규직 자체를 쓰지 말자고 한 건 아니다. 최소한 상시지속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쓰지 말자는 거였다. 단기 프로젝트성 업무와 같은 상시지속 업무가 아닌 경우엔 비정규직을 써도 좋다고 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요구가 들어맞아 계약직을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면 노조와 협의를 해달라고 했다.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우리 회사에서 충분히 들어줄 만한 조항이라고 생각했다.

환경운동 시민단체 녹색연합 홈페이지에 있는 활동가 노동권리 내용



과거에 있던 경험이나 문제들 때문에 단체협약에 이런 조항들을 넣고 싶은 거냐.
앞으로는 안 그럴 거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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