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아홉 살, 크리스마스의 기억

by 모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있다! 있어!'


엄마, 아빠, 언니가 아직 자고 있었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괜한 손만 허공을 가로질렀다.
빨간색 포장지에 싸여 내 머리맡이었던 곳에 단정히 놓인 직사각형의 이것!
내 인생 처음으로 받아 본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옆을 보니 언니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이 시간을 혼자 조금 더 만끽하기로 했다.
나는 선물을 쉽사리 뜯지 못하고 요리보고 조리 보며 안에 든 게 무엇일지 상상해 보았다.
손 끝의 촉감과 크기나 형태로 보아 대충 짐작이 갔다.


더 참지 못하고 포장지를 뜯었다. 비닐로 된 포장지에서 '빠지락' 소리가 났다. 식구들이 깰까 포장지에 붙은 테이프를 손톱으로 조심조심 긁어 하나씩 떼어냈다.
포장지 속 선물은 필통이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갖고 싶었던 필통이었다. 친구들은 다 갖고 있는데 나만 없던 그것이었다.
이불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필통을 감상했다.

앞 뒤로 연필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커버는 자석으로 고정되어 쉽게 열고 닫을 수 있었다.
그 커버 위로 세 개의 버튼이 있었는데 누를 때마다 숨겨진 공간이 로봇 팔처럼 툭 하고 튀어나왔다.
이 공간은 지우개를 넣으면 딱일 것이다.
나는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닫아보고 커버도 열고 닫아보았다.

반대쪽 커버를 열었을 때, 필통 크기에 딱 맞는 노란색 색지에 적힌 편지를 발견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짧은 편지글의 마지막은 확실히 기억난다.

'산타할아버지가'

나는 처음 받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필통 겉면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닌자거북이가 웬 말인가!'

나는 닌자거북이를 애써 외면도 해보고, 그래도 '필통은 분홍색'이라는 사실을 위안도 삼았다가
아홉 살 여자 아이 취향을 이렇게나 몰라주는 산타할아버지를 살짝 원망도 해보았다.
그렇게 애써 받아들일까 하던 나는 곧 절망했다.
마침 잠에서 깬 언니의 선물 언박싱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니의 필통에는 무려 '쥬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럴 수가! 나는 닌자거북이인데?"

언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필통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러다 그래도 분홍색이니 괜찮지 않냐, 그려진 거북이가 여자인 것 같다느니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필통을 처음 본 언니의 미간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정을 들은 아빠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림이 뭐면 어떻냐고 뭘 모르는 소리를 했다.
하루 종일 침울한 딸의 얼굴이 못내 마음이 쓰였던 아빠는 끝내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가자! 필통 바꾸러!"


토끼눈을 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작은 고모네 미용실 옆에 있는 문구점이었다.
같은 필통이 여러 개가 있었고 필통에 그려진 그림도 여러 가지였다.
아빠는 계산대에서 '내가 고른 필통'과 '산타할아버지가 주신 필통'을 교환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나는 마음에 쏙 드는 필통을 가진 대신 산타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참 아빠도.. 하필, 고르고 고른 게 닌자거북이일 게 뭐람.'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농담 섞인 푸념을 한다.

처음으로 딸의 선물을 준비했을 아빠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나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을 했다.

'알고도 모른 척'은 때때로 서로의 마음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다.

나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시절 아빠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한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도 내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알고도 모른 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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