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었던 이유들

by 모온


떠나지 못한 데에는
하나의 이유만 있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선택이 아니라 상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금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나아질 것 같았고,
상황이 정리되면 달라질 여지도 있다고 믿었다.
문제가 구조라기보다는
과정 중의 불편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왔다는 감각이 있었다.
시간, 노력, 설명, 조정.
여기까지 온 걸 생각하면
되돌아가는 쪽이 더 큰 손실처럼 보였다.
떠나는 선택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감당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경제, 아이, 가족.
혼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를수록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가능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버틸 수 있는지의 문제로 바뀌었다.


그 시기의 나는
떠나는 상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상상은 늘
지금 상태를 조금 더 견디는 쪽으로만 이어졌다.
어떻게 나아질지보다는
어떻게 유지할지가 먼저였다.


관계를 떠나는 일은
단순히 관계를 끝내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해온 모든 판단을
다시 의심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부담은 생각보다 컸다.


그래서 나는
버티는 쪽을 택했다.
그게 더 익숙했고,
덜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이었고,
떠나는 일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불확실함이었다.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해질수록
떠나는 선택은 더 어려워졌다.
체력도, 판단력도
이미 많이 소모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는
결정을 감당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시기의 나는
용기가 없어서 남아 있던 게 아니다.
다만
남아 있는 쪽이
그때의 나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처럼 보였다.


이 글은
떠나지 못한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다만
왜 많은 사람들이
‘왜 바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지를 설명하는 쪽에 가깝다.


다음 이야기는
이 모든 이유들이 겹친 끝에
어느 순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자체를 인식하게 되었던 때에 관한 기록이다.
바닥에 닿았다고 느꼈던 순간,
그리고
생각이 처음으로 이동했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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