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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도둑

2008년 ME SUPER fuji reala 100

by 모레


흰둥이에겐 아빠가 직접 나무를 고르고 톱질하고 도배까지 해준 번듯한 집 한 채가 있다.

페인트 대신 인테리어를 통일해야 한다고 거실과 똑같은 벽지를 발라 주었지만, 디자인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던지 흰둥이는 그걸 다 물어뜯어 버렸다.

그 후 몇 번 더 수리했지만, 그때마다 물어뜯고 긁어버리기 일쑤였다.


거실 한쪽엔 큰 사이즈의 강아지 전용 방석도 있다.

떡실신 방석이란 애칭이 무색하게 흰둥이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흰둥이가 좋아하는 책상 아래나 잘 누워 있는 곳마다 방석을 놓았지만 잠을 청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내가 있든 없든, 내가 잠을 자든 말든, 그것과는 별개로 흰둥이는 밤이 되면 내 침대에서 잠을 잔다. 잠잘 때뿐일까. 장난감과 한바탕 놀 때도, 간식을 먹을 때도, 껌을 씹으며 시간을 보낼 때도 흰둥이는 매번침대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흰둥이가 침대에서 놀고 잠을 것은 아다.


어릴 땐 침대에 오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스스로 오를 수 있는 높이도 아니었지만, 배변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흰둥이에게 침대는 금기의 장소였다.


시작은 침대에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몸집이 커지면서였다.

그래도 흰둥이는 지금까지 침대나 침구류, 카펫 등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흰둥이가 침대에서 문제를 일으켜 못 오르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강력한 의지로 침대를 사수하려 한다면, 절대로 '이번 한 번 뿐이야'라는 생각에 강아지를 침대에 올려두지 말 것이다. 당신의 단 한순간의 허락은 곧 강아지에게 침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이~ 그렇게 까지야...


세상 귀여운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강아지를 뿌리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심장이 강철이면 모를까. 비록 나는 실패했지만. 그런데 대부분 실패하지 않나?


그래도 한때는 흰둥이가 침대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법을 찾아다녔고 수많은 방법 중 인터넷에서 찾아낸 레몬 스프레이가 있었다.

훈련 시 말을 안 듣거나 고집을 피울 때 특효약이라는 레몬즙 스프레이.

분무기에 물과 일정량의 레몬즙을 넣어 그것을 뿌려주면 시큼한 냄새에 정신을 빼앗긴 강아지가 전해져 수월하게 훈련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레몬즙!!! 이게 바로 특효약이라 이거지, 이제 다 끝이야 ^^


흰둥이가 침대에 오르려는 순간 슉- 레몬즙이 든 분무기를 허공에 쏘았다. 처음엔 흰둥이도 당황했지만.


그래, 이대로 성공~


하는 순간, 흰둥이는 촵촵 거리며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먹었다. 당황해서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아예 침대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말이다. 허탈한 순간이었다. 통레몬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 인간은 봤어도 레몬즙을 촵촵하는 강아지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닌가

저렇게 먹다가 탈이 나면 어쩌나 걱정에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그 후로 잠을 자고 있는 흰둥이를 내려도 봤고, 위엄 있게 여긴 내방이고 내 침대야 말도 해봤지만, 애처롭게 낑낑대는 강아지 앞에서는 이겨낼 재주가 없었다.


그러다 본 풍선을 이용한 공포 훈련.

사실 이건 풍선 터트리기 강아지 기네스 영상이었는데 대부분 강아지는 터질 때 소리에 놀라는데 이걸 문제 행동 훈련에 사용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훈련에 필요한 만큼 풍선을 준비하고 흰둥이가 침대에 오르려는 순간 풍선을 터트리면 되는데... 아뿔싸!

나는 풍선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펑~ 풍선을 터트려야 하는데 손이 떨려 풍선을 잡고 있기도 무서웠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불다가 터질까 두려워 도무지 풍선을 크게 불 수가 없었다. 반면에 흰둥이는 잠깐 놀라긴 했어도 풍선이 터지는 걸 즐거워했다. 내가 공포에 바들바들 떨며 겨우 풍선을 불면 빨리 달라고 낑낑댔다.

침대에 못 오르게 하겠다는 나의 훈련은 풍선 빨리 터트리기 기네스에 도전할 만큼 일취 월장하며 끝이 났다.

풍선 공포증이었던 나는 흰둥이가 터트리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누가 강아지와 잠을 자느냐로 동생과 싸웠던 일이 있었는데 이쯤 됐으니 흰둥이에게 침대를 허락하고 함께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사실 나는 강아지를 안고 자는 로망이 있었다

흰둥이가 이런저런 훈련에도 침대에 올라오는 걸 포기하지 않으니 엄마아빠에게 이보다 더 좋은 핑곗거리를 댈 수 없었다.

나는 침대에 올라온 흰둥이를 품에 안고 잘 생각에 신이 났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 보송보송 털북숭이를 품에 안고 새근새근 들썩이는 볼록한 배를 쓰다듬으며 꿈나라로 가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하니 신이 났다.



그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산산이 깨준 것도 흰둥이다.

흰둥이는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지 내 품에서 잠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품에 안으려 하면 잠자는데 건드린다고 짜증을 냈다.


흰둥이에겐 침대에도 나름 구역이 정해져 있다.

밤에 잠을 자는 공간, 낮에 낮잠을 자는 공간.

그 공간들을 뺀 나머지가 내가 잠을 잘 수 있는 영역이다.

개가 영역을 나누는 동물이라지만 이 작은 침대에서 자신만의 영역이라니.

그것도 내 침대에서 말이다.

이 귀여운 침대 도둑을 어찌해야 할지.........



흰둥아, 여기는 내 침대야!
우리가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지만
여기 니 장난감 너무 많은 거 아니니?
잘 땐 치워줘야지 아니면 너도 내려가던가.




알겠어요.

강아지란 아무 데서나 이렇게 자는 거죠.



근데

자는 강아지 내쫓고 잠이 와요?

나는 이 좁은 데서 이러고 있는데

넓은 침대 혼자 쓰니까 좋아요?



알았어, 미안해.
근데 이거 누나 침대란 말이야.
나도 편하게 좀 자보자



흰둥이 어디 갔지?


늦은 밤,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흰둥이가 보이지 않아 찾으면


자러 간 지가 언젠데.
아까 벌써 자기 방에 들어갔어.


하지만 흰둥이는 자기 집에도 소파 밑에도 방석에도 없다.


어디? 흰둥이 집에 없는데.


하는 말에 어이없게도 식구들은 모두 내 방을 가리킨다.


저기가 왜 흰둥이 방이야, 내방이지!
야, 너 안 일어나!


z z z
...
z z z
...
z z z


그렇다.

지금은 저게 내방인지 제방인지, 내 침대에서 내가 자는 건지, 흰둥이 침대에서 내가 붙어 자는 건지 모를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강아지와 한 침대에서 잘 경우 수면의 질이 나빠진다거나 강아지가 불리 불안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대체로 자는 쪽을 건드리는 게 나라서 흰둥이의 수면의 질이 나쁠 수 있겠고, 없으면 허전해하는 쪽도 나라서 분리불안도 내가 겪고 있다.


나는 잠든 흰둥이가 깨지는 않을까 오늘도 살금살금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밤새 불편해하지 않도록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그렇게 우리는 10년 넘게 침대를 나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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