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시작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

나의 기획이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계몽을 목적은 아니었는지

by Yoo

맨 처음 기획은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정확하게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서 내가 느끼기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의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인식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욕구는 개인의 신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푸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데 왜 아무도 풀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한번 그 문제를 풀어보겠어!'라는 당차고 순순한 마음에서 기획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기획하고 설득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처음 기획을 시작한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변질되기도 합니다. 문제를 명확히 하고 해결 방법을 스스로 기획하는 단계에서 마주치는 유혹은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가설이 잘 못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더라도 애써 그것을 모른 척하려는 유혹입니다. 조금 멀리서 봤을 때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왜 안 풀었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문제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복잡한 이유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문제가 '해결해야 할 가치 있는 문제'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합리화하며 이미 많은 시간을 쏟았기에,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문제를 문제라고 억지로 정의'하는데 많은 힘을 쏟기도 합니다.


또한 내가 생각한 문제가 다른 사람도 문제라고 느끼게 하는 설득 과정에서는 상대방의 생각을 반영한다는 합리적인 이유로 기획의 본질을 흔드는 유혹에 마주칩니다. 통상 조직에서의 설득은 상급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따라서 기획자가 A가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정의하더라도 상급자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A'라는 의견을 내었을 때, A와 A'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A'가 아니라 A로 해야 된다고 온전히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일단 실행을 하려면 설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A와 A'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A라고 자위하며 조금씩 문제의 본질을 스스로 흐리기도 합니다. 설득을 과정을 지속하며 이제는 내가 생각한 문제가 중요한 문제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기획서를 보고'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며 A라는 문제는 A'가 되고 A''가 되고 때로는 아예 다른 B와 C라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기도 합니다.


기획의 실행 과정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획의 시작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의 생각을 오롯이 조직과 시장에 공개하며 기획이 실제로 올바로 작동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기획의 시작과 실행사이에 마음 한편에는 느끼고 있지만 애써 모른척하고 있던 진실이 있었는지를 사람들의 피드백을 통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나의 기획이 나의 상상 속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문제이며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나아가 내가 정말로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었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계몽하기 위해 기획을 시작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문제의 발견이 기획자의 신념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기획자는 선민의식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사고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모르니까 내가 알려주고 해결해 줘야지'라는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한 기획으로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때문에 기획자는 반드시 실행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육하고 가르치기 위해 기획을 한 것이 아닌지, 사람들의 상식적인 행동과 사고를 무시하고 내가 생각해 놓은 정답지에 맞춰 넣으려고 한 것은 아닌지, 나의 기획이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행의 시간은 링 위에서 두렵지만 마주치고 맞고 구르고 실수하며 그럼에도 용감하게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밖에서 고고하게 비평하고 해설하며 불만을 갖고 평가하는 기획은 스스로는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링 위에서 굴러본 사람만이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고 상상을 점점 현실로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회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사람이기에 손과 몸에 흙을 묻히고 싶지 않고 힘들게 땀 흘리며 진흙탕에서 구르고 싶지 않은 욕구는 매번 찾아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남는 것은 고고한 생각이 아니라 구르면서 느꼈던 좌절과 희열이었던 사실을 상기하며 용기를 내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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