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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칠이 일상꽁트 Jun 01. 2016

100일의 기도, 새빨간 달콤함_문척 꿀수박

뚜벅뚜벅 취재일기

마트에는 벌써 수박들이 넘쳐난다. 어른 머리통보다 커다란 놈들이 매끈한 자태를 뽐내며 '9,900원부터~' 이름표를 달고 있다. 한여름이나 돼야 맛보던 것들이 이제는 늦봄부터 세일을 할 정도로 넘쳐난다.


오늘은 6월 중순 출하를 준비하는 구례군 문척면 수박 농장에 다녀왔다. 이제 겨우 초여름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작물들이 성장하기엔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람의 피를 말리는 날씨다. 평소에는 가방 둘레 매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뚜벅이로 취재를 다니지만 회사 동생의 촬영 일정과 겹쳐 에어컨 빵빵한 차를 타고 편하게 가는 호사를 누린다.


한참을 달려 농부의 집 근처에 도착한다. 시골에서 집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도로명 주소가 써진 팻말 밑에 집주인의 이름까지 친절하게 쓰여있으니. 빨간 지붕의 정겨운 시골집 담장은 초록 덩굴로 덮여있고 집 앞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보인다. 흐드러지게 핀 고운 빛깔 장미는 바람결에 향기를 전해주고  집을 지키는 덩치 큰 개들은 낯선 이들의 방문을 경계하며 연신 목소리를 높여댄다.

 

조심히 마당으로 들어선다. 농부의 취미는 분재인가 보다. 화분 화분마다 멋들어진 분재들이 마당 가득이다. 특이하게 마당 한편에 양봉에 쓰이는 몇 개의 벌통이 보인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꿀벌들은 우리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연신 꿀을 따다 나르기 바쁘다.

"누구요?"

놀란 토끼눈이 된 노모가 우릴 보고 나와 묻는다.

"누구 댁 맞죠? 아드님 뵈러 왔어요"

그 소리에 노란 옷을 입은 귀여운 인상의 농부가 나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그의 자랑인 수박하우스로 간다.


그냥 서있어도 연신 부채질을 하게 되는 날씨인데 하우스 안에 들어가려니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방법이 있나. 주저주저하며 하우스 안으로 들어선다. 턱! 숨이 막힌다. 온도 높고 습기 많은 한증막이 따로 없다. 잠깐의 방문도 이리 힘든데 이곳을 터전 삼아 일하는 농부의 노고에 잠시 숙연해진다. 하우스 안은 이제 출하를 얼마 앞둔 큼지막한 수박들이 그득하다. 한동에 440통의 수박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수박농사는 꼬박 100일 농사다. 종묘사에서 모종을 사다가 2월 말 정식을 한다. 가지가 나면 가운데 모순과 양 옆에 2개의 자순을 남기고 남은 옆순들은 가지치기를 한다. 일일이 마디를 세어가며 하는 일이다. 총 9동의 하우스 가치 치기가 매일매일 이어진다. 한 개의 모종마다 15-25마디가 될 때까지 가지치기를 해야 하니 꽤 길고 지루한 시간이다. 9동을 다 돌며 가기치기를 한번 끝내고 나면 다시 첫 번째 동의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가지의 마디수에 따라 달리는 잎의 양도 다르고 그에 따른 광합성의 양도 달라진다. 이런저런 영향들로 마디의 수에 따라 수박의 크기가 달라진다. 농부의 수박은 8-9킬로 정도의 크기로 실하게 달려있었다.  


이곳은 수박을 무농약으로 키우고 있다.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으니 하우스는 풀밭이다. 처음에는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매지만 이제 출하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풀들을 그냥 뒀다. 덩굴과 풀들이 어지럽게 얽혀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법칙이 있다. 가지치기를 일정하게 하기 때문에 수박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을 지어있다. 이렇게 일정하게 크고 있으니 생육 정도 확인도, 수확도 훨씬 쉬울 것이다.


가지치기를 끝내면 가지마다 꽃이달린다. 자세히 보면 암꽃과 수꽃이 다르게 생겼다. 암꽃은 꽃받침 밑에 작은 열매를 달고 있다. 수박 새끼다. 이때 수꽃의 화분을 묻혀 수정을 해주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수꽃을 꺾어 일일이 암꽃에 묻혀 인공수정을 했다. 하지만 일손 구하기 힘든 농촌에서 손이 많이 필요했고, 수정률도 낮았다. 그래서 꿀벌로 수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당에서 윙윙거리던 벌통을 하우스 한가운데 넣어두고 일주일을 기다리면 하우스 한동의 수정이 끝난다. 수정률도 좋고 품도 적게 들고 맛난 꿀은 덤이다. 하우스가 더워 꿀벌들이 죽을 수 있으니 딱 일주일 일을 시키면 벌통을 다시 집 마당으로 옮겨 같이 생활을 한다. 그리고 채밀을 하면 제법 많은 양의 꿀이 얻어진다.

그렇게 수정이 잘되면 열매가 크기 시작한다. 한 줄기에 1개의 수박만 달리도록 열매솎기까지 끝내면 그때부터는 하늘의 몫이다.


수박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넝쿨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다. '이런....' 수박이 달린 꼭지를 밟아버렸다. 수박이 똑하고 줄기에서 떨어다. 낭패다. 이 한통을 얻기 위해 수없는 가지치기를 했을 텐데. 죄송한 마음에 연신 사과를 하니 인심 좋은 생산자는 더 크고 예쁜 놈을 따주려 했는데 미리 따버렸다며 웃어주신다. 오늘 수박 촬영은 이놈으로 해야겠다.

 

모든 촬영과 인터뷰가 끝나고 하우스를 벗어나다. 폭염주의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함을 느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땀범벅이다. 모델의 역할을 충분히 해준 수박으로 목을 축이자고 하신다. 나서서 잘라보려 하지만 살림 서툰 아가씨 티가 나는지 칼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내손에서 칼을 뺃어드신다. 쩍쩍 수박이 갈라진다. 아직 출하가 일주일 정도 남아서인지 중간중간 하얀색으로 덜 여문 씨가 보인다. 성숙이 덜됐으니 감안하고 먹으라신다. 한입 베어 문다. 걱정과 다르게 너무 달콤하고 맛있다.

"지금도 이렇게 맛있는데 일주일 후면 어떻게 달라져요?"

"지금은 아직 11브릭스 정도의 당도지만 일주일 후면 12-13브릭스는 거뜬하지."

농부의 자랑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꼬박 100일, 한증막 같은 하우스에서 농부의 봄과 여름이 끝나간다.
오늘 만난 새빨간 속살의 탐스러운 열매는 그 안에서 흘린 값진 땀의 보상 이리라.

나에게 수박은 마트에서 흔하게 치이는 과일이었다.
먹고 나면 그 뒤처리가 골치 아프고, 한통을 사면 꼭 반통은 버리게 되는 귀찮은 과일.

그것들도 어떤 이에게는 100일의 땀이었을 것이다.


이제 먹는 수박은 어제 먹은 수박과는 조금 다를 것 같다.

곰도 사람이 된다는 100일, 그 긴 시간을 하루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낸
부지런한 농부의 새빨간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2016.05.26

뚜벅뚜벅, 뚜벅이로 다니는 전국 팔도 취재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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