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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씨 May 29. 2023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다 그쟈?

       

내 뜰에 20년은 족히 묵은 단풍나무의 속내에 내 모르는 사이 떼를 지은 개미들이 이삼 년을 들끓었나 보다. 나무의 속을 갉아 저들의 뱃속을 얼마나 가득 채웠는지 목질의 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한동안 나무의 안녕이 걱정이었지만 ‘나무도 나이를 먹으면 속이 빈다’는데 하며 잠시간 작은 시름을 벗고 여유를 찾자 했다. 단풍의 단맛은 이제 다 빠져버렸으니 더는 개미가 찾지 않기를 바랐다. 나무의 속은 비워져 버렸으니 단풍의 그 속내도 이제 조용하겠지? 하니 내 속도 덩달아 조용하고 평평해졌다. 나이를 먹고도 제 속 그때그때 비워내지 못하면 욕먹는 꼰대 짓밖에 더할 것인가? 했다.     


나무는 옮겨 심으면 한 삼 년은 뿌리 앓이를 한다 했는데, 하물며 집을 짓고 가꾸는 일, 작은 우주를 짖는 그 곤고함이란 말해 뭐하랴 싶다. 나의 작은 우주 내 집은 몇몇 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행이지? 한다. 집을 지은 얼마 후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옮겨와 심은 지 6년 지난 지금은 속이 다 비어버린 단풍. 그럭저럭 잘 버텨 낼 것으로 생각했다. 단풍이 흩어 놓은 수많은 낙엽이 건재하고 울창했던 여름날을 떠올리게 해주어 한결 안심된다.    

 

지붕 위를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가마우지 떼가 보기에 장관이다. 볼 때마다 상서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어 좋았는데. 지난여름 이후로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제법 걱정되는 가을 아침이다. 제법 차가운 공기가 어깨를 스쳐 흠칫하며 옷깃을 오므린다. 기온이 떨어지니 담장 밖 은행나무 가지에 이른 새벽 소란을 몰고 오는 참새떼도 직박구리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여름내 무성한 잎과 가지 사이 새들이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주었는데 잎이 떨어지니 참새들은 떠났고 직박구리들은 뜸해졌다. 이제 저렇게 혼자 우뚝 서서 칼바람과 겨울 눈을 견디고 또 견뎌 봄을 맞이하겠지.     

나무는 안 옮겨도, 사람은 옮겨야 잘 산다는데. 그것도 맞춤일 때가 있지, 사람 노릇 한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있지도 않을 재화에, 분에도 없을 명예 따위 늘릴 욕심일랑 이젠 놓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 일도 줄이고 주변 사람도 줄였다. 당분간은 일이든 사람이든 찾아가지 않을 것이고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나무도 나이 들면 속을 비운다는데 나도 이제 주변을 줄이고 그렇게 속을 비워야 할 때이다.


해지면 자리 펴고 해 뜨면 이불 개고,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을 열면 마음에 드는 벗을 맞이하고, 어쩌다 그 문 나선다 한들 뜰 앞 마음 둔 꽃나무를 즐기면 그뿐. 혹 맘이 동하면 제법 먼 길 좋은 풍광을 찾아 즐기며 잠시간의 심심 타파면 그뿐. 인제 와서 무엇을 위해 이곳저곳 돌고 나들어 욕될 수밖에 없는 일들 더 늘린단 말인가.     


아이들도 제 밥벌이를 위해 서울로 자릴 잡아 집을 떠났고, 집을 찾는 일이 점점 뜸해지는 어느 날, 마당의 장작 난로 곁에 앉아 두런두런 푸념하던 우리 둘은 제법 쓸쓸했다. ‘사람은 옮겨야 산다잖아!’ 하며 아이들을 보낸 우리의 허전함을 한 움큼 덜었다. 메마른 낙엽들이 마당에 지천이고 그만큼 쓸쓸도 지천인데, 그냥 두었다가 천천히 쓸어 주마 했다. 집을 지은 후 우리는 요란하지 않게 한 두 걸음씩 자연에 가까워지며 물들고 있다고, 그래서 스스로 대견하다고 함께 생각했다. 우리 모르는 사이 우리 안에서 뭔가는 흘러나갔고, 또 그 빈자리에 스며든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가고 있음을 함께 느낀다.    

 

아내가 봄날에 심어 놓은 바늘꽃, 가을 추위에도 여전 분홍빛이 살아있다. 바늘꽃 가지들 흔들려 찬 기운이 일렁인다. 이제 곧 다가올 긴긴 겨울. 우리는 서로를 훈훈히 덥히며 살아 보련다. 언제부턴가 몹시도 빨라져 버린 시간. 문득 울컥하고 문득문득 쓸쓸해질 서로를 위로하면서. "새봄. 별일 없을 새봄. 또 무엇을 기대하며 허망한 시간을 보낼까?" 하고 푸념 되면 "그게 인생이지 뭐!"하면서.     


무슨 일 있을 까닭 없는 봄. 작고 귀여운 허망과 희망으로 기다리겠지. 긴긴 겨울 가마우지도, 참새떼도, 직박구리도, 박새들도, 우리 집 아이들도, 다정한 지인들 우릴 찾지 않아도, 그래서 조금은 외로워져도 괜찮겠지 뭐. 외로우니까 사람이라잖아. 우리 집 안팎이 조금은 비워져도 우리의 속내가 조금은 허전해져도 우리 집은 늘처럼 그렇게 따뜻할 거야. 그쟈?  


2022년 늦은 가을   

          


象村상촌 申欽신흠 1566~1628 인생삼락     

閉門閱會心書(폐문열회심서) 開門迎會心客(개문영회심객)

出門尋會心境(출문심회심경) 此乃人間三樂(차내인간삼락)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다. 문 열고 마음에 맞는 벗을 맞는다.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는다. 이것을 일러 인생삼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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