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보이는 바닥의 단단함

by 모아키키 정세복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보이는 바닥의 단단함



'완전히 망했다'는 말은 대개 마침표처럼 쓰입니다. 쌓아 올린 성벽이 무너지고, 통장의 숫자가 바닥을 드러내며, 곁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그림자를 감출 때 사람들은 흔히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 지점은 분명 춥고 황량하며,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아득한 절벽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무너진 잔해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준 것이 나의 유능함이나 견고한 자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운과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수식어가 떨어져 나간 뒤에 남은 '나'라는 사람의 초라하고도 선명한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파산은 경제적 사망 선고인 동시에 기묘한 해방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거대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내일의 폭락을 걱정할 필요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꾸며낼 필요도 없습니다. 0(zero)이라는 숫자는 잔인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 정직한 바닥에 발을 딛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 허상을 짊어지고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실패의 한복판에서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세상을 보는 해상도입니다. 예전엔 당연하게 여겼던 끼니의 온기, 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아무런 이득이 없음에도 곁을 지켜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돈이 자유를 만들어준다고 믿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살아있음' 그 자체의 가치가, 돈이 사라진 자리에 조용히 피어납니다.



물론 이 과정을 찬미하거나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무너짐은 고통스럽고, 바닥의 냉기는 뼛속까지 시립니다. 다만 그 고통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내가 생각보다 질긴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여전히 숨을 쉬고, 무언가를 고민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의지를 품고 있다는 것. 그것은 통장 잔고가 줄 수 있는 안도감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쌓아 올릴 성벽을 설계하기보다, 내 발밑의 바닥이 얼마나 단단한지 가늠해 보려 합니다. 무너짐을 실패가 아닌 '덜어냄'의 과정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아직은 다시 일어설 힘이 충분치 않지만, 적어도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지금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이 정도면 다시 시작하기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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