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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Aug 14. 2024

순례길에 고어텍스 등산화가 필요한 이유

순례길 Day 8 Markina

외딴 알베르게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길을 나섰다. 어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받은 아침은 간단했지만,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간단한 식사의 최선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하니 어두운 산길이 무섭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화살표에 의지해 걷다가 이상함을 느꼈는데, GPS와 지도 상으로 표시된 길과 순례자의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길이 다른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괜히 길을 잃을 뻔 한 순간이라 몸이 얼어붙었다. 어쨌든 앱을 따라 계속 걸었고, 무사히 길을 잃지 않고 도착했다.

오늘은 진흙길을 걷다가 신발이 온통 더러워졌다. 덕분에 왠지 진정한 순례자의 신발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랄까. 산길이 많은 북쪽길에서는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있는 곳이 꽤 있었기에 튼튼한 신발 덕을 잘 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험해진 길을 걸으니, 계속 바닥을 보고 걸어야 했고 덕분에 귀여운 도토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페인 들판에는 하얗고 여러 송이가 한 번에 달린 들꽃이 널려있다. 이곳의 땅과 물을 먹고 자라는 식물들은 내가 살던 곳의 것들과 퍽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왠지모를 익숙함을 가지고 있다. 이 하얀색 꽃은 한국의 개망초를 닮았다. 들판 어디에나 잡초처럼 자라나 언뜻보면 무질서하지만, 그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다. 

어제저녁에 슈퍼에서 산 빵을 남겨서 들고 가다가 아침으로 먹었다. 그동안 맛있는 바게트들을 많이 먹어왔던터라 어제는 한국에서 먹었던 빵들과 비슷한 식감이라는 생각에 많이 실망했었다. 그런데 오늘 길에서 다시 먹으니 왠지모르게 어제보다 더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듯 했다. 그새 맛이 변한 것인지 신기했고, 가지고 있던 잼과 햄을 꺼내어 함께 먹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 좋았기에 굳이 멈추어 쉬지 않고, 산책을 나온 듯 빵을 한입씩 베어물며 길을 걸었다.

소를 봤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소. 엄청 크고 뿔도 뾰족해서 살짝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 무리의 가족이 내가 지나가는 내내 시선을 따라오며 나를 응시해서, 발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이 한적한 시골에 북쪽길은 순례자들도 많지 않아서, 아마 저 소에게 나는 참 이상한 방문객이었을지 모른다. 

저녁으로는 슈퍼에서 산 빠에야를 먹었다. 지난번에 식당에서 먹으려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후로, 쌀에 대한 갈증이 계속 커지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귀한 밥이었다. 즉석식품이지만 모든 재료들이 맛있었다. 슈퍼에는 빠에야를 만들기 위한 전용 '빠에야(냄비의 명칭)'을 팔고 있었다. 호주에서 만난 나의 스페인 친구는 '스페인 음식'으로 토르티야와 미트볼을 해주었어서, 빠에야가 실제 주민들에게는 생활음식으로 평범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도 슈퍼에서 냄비 자체를 팔고 있는 것을 보니 아주 관광객 음식은 아닌 것 같다.

숙소는 참 깨끗하고 좋았지만, 7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가 10시가 다 되도록 끝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든 소리를 침실에서 들어야 했기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다양한 알베르게에 매일 머물는데, 나름대로 둔하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가끔씩 불편함을 느끼게 될때가 있다. 그래도 이렇게 자잘한 경험들이 나에게 유연성을 더 선물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조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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