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9 Mendata
어제 알베르게의 여파로 기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채로 늦은 시간에 불을 환하게 켜버리고 큰소리로 대화하는 사람들 덕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터였다. 한번 부정적여진 마음은 다잡기가 쉽지 않다. 그저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다른 것을 찾아 몰두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그저 걷기만 하니 오히려 더 굴 속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흥미로웠던 것들을 종종 사진 찍어 두었다. 여자/남자가 함께 표기된 안내 그림과 작고 귀여운 달팽이. 길을 걷다 보면, 하루에 최소 3번은 달팽이를 볼 수 있다. 탁 트인 산골 마을은 매일 봐도 귀엽다.
호주에서보다 훨씬 더, 올드카가 자주 보인다. 강렬한 색감을 가진 차들을 차곡차곡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모두 각자의 개성이 살아있는 모양새가 한국과는 참 달라서 부러울 때가 있다. 아마 이곳의 이런 문화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언제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혹은 나와 반대인 것을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봐온 산악 지형의 평범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지루해지던 차에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숲길을 발견했다. 분명 습도는 높지 않은데, 울창한 숲에 가득 자라있는 이끼와 흐린 하늘에 비치는 햇빛이 모든 걸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걷고 걷다가 도착한 알베르게. 잠깐 마주친 사장님의 인상이 정말 푸근했다. 가방을 얌전히 맡기고 체크인 시간까지 기다리기 위해 동네 바에서 맥주 한잔을 마셨다. 옆을 보니 며칠간 같은 길을 걸어오던 독일 사람들 중 한 명이 오늘은 혼자 도착해 있었다. 길에서 만나 함께 걷는 이들도 각자의 속도에 따라서 걷는 순례길이다. 아무튼 그 사람과 독일 얘기를 좀 하다가, 가성비 좋은 독일 맥주를 추천받기도 했다. 다른 일행이 도착하자 그 독일 사람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파서 무려 4천원짜리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더 먹었다. 그렇게 혈당 스파이크를 맞고 테이블에 엎드려 삼십 분쯤 잤을까, 체크인 시간이 되어 다시 알베르게로 행했다.
푸근한 외삼촌 같은 사장님처럼 알베르게 내부도 참 포근했다. 낡았지만 잘 가꾸어진 시골 집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오늘의 석식을 먹었다. 스타터로 나온 야채수프는 특별하지 않아도 조금 더 먹고 싶은 그런 맛이었다. 오늘은 여행을 온 프랑스 가족이 순례자들과 함께했는데, 앞자리에 앉은 어린아이가가 너무 귀여워서 사실 수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프랑스 단어 ‘미뇽’이 귀엽다는 표현이 맞는지 프랑스 순례자 아저씨에게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아기에게 미뇽이라고 말해주었다. 내내 아빠의 품에서 까르르 거리며 노는 아이가 내 말을 듣더니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의 미소가 참 예뻤다. 아기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프랑스 중년 부부가 앉아있었다. 삼일 정도 함께했을까, 친절한 미소와 얼굴은 익었지만 대화는 그다지 깊게 해보지 못한 그 아저씨가 아이를 보며 아주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는 밥을 좀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음식을 모두 만들고 나온 주인아저씨가 아이와 마주치자 역시나 환한 미소로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한 아이가 온 공간을 밝게 비추는 것이 참 따뜻했다.
이곳에서는 말은 잘 안 통해도 참 따뜻해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매년 일주일씩 순례길을 걷는다는 그 프랑스 중년 부부는 참 따뜻한 사람들 같았다. 잘은 몰라도 아이에게 향하는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기에 따뜻함을 느끼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