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10 Muxika
비가 오는 날 새벽, 어김없이 길을 나섰다. 바닥에는 온통 달팽이들이 잔뜩 나와있어서, 마치 달팽이 찾기를 하는 것 마냥 바닥을 보고 걸었다. 뾰족한 등산화에 달팽이가 부서지는 일만큼은 만들지 않기를 바라며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첫 번째 마을에 다다랐다. 작은 마을에서 자주 보이는 이 표지판은 볼 때마다 참 귀엽다. 걸어 다니는 사람, 공놀이하는 아이, 작은 집과 차. 뭘 조심하라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참 아기자기한 마을이라는 건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오늘의 아침은 스페인에서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라테는 호주에서 마시는 것만큼 훌륭했고, 갓 데워준 바게트는 정말… 그 자체로 완성형이었다.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작은 마을 그레노키는 내게 여러모로 좋은 기억이 될 것 같다.
긍정적인 말들은 힘이 있다. 긍정적인 말들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나도 이제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내내 흐리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지고, 햇살도 뜨거워졌다.
호주에서는 캥거루를 조심하라는 표지판을 흔하게 볼 있다. 스페인은 사슴을 조심하세요!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판초우의를 입고 걷던 중이었기에, 그마저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가던 길에 작은 마을의 성당에서 잠시 비를 피해 점심을 먹고, 다시 걷다가 쓰레기통의 귀여운 캐릭터를 발견하고, 별안간 MZ샷을 찍어대는 등 평범한 일상이다. 여행을 일상처럼 하는 순례길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순간이었다.
고어텍스 운동화라 그나마 전체 침수는 피했지만, 온통 촉촉했던 풀들로 인해 양말이 젖었다. 새로 산지 약 10일 정도 된 나의 소중한 깔창을 꺼내어 말렸다. 매일 걸으니, 옷보다 중요한 건 신발이더라.
오늘의 사장님도 동네 아저씨 같이 푸근하신 분이었다. 처음 보는 원반모양의 파스타 수프와 양파 야채샐러드는 평범해서 더 좋았다.
독일 사람들과 함께 앉아 식사했다. 그들은 종종 영어로 나에게 설명을 덧붙여주며 대화했다. 사나흘정도 함께 이동해 온 사람들인데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섯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분과 20대로 보이는 남성분, 그리고 내내 근엄해 보였던 70대 남성분이었다. 근엄한 그분은 알고 보니 내내 진지한 농담을 던지시는 유머러스한 분이셨고, 여성분은 독일에 있는 집에 초대해 주시며 따뜻하게 인사해 주셨다. 너무 포근한 저녁이었다.
나를 위한 솔직함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면, 그것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에 오히려 더 불편함을 느끼거나 두려움에 숨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 후자의 불편함과 두려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봐 혹은 굳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위로로 말이다. 결국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우선으로 배려한 불편함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 나의 삶을 살려면, 이런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고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가져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오히려 그것이 주변을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