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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Aug 12. 2024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순례길 Day 7 Barrio de lbiri

 오늘도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지만 뜨거운 햇살에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옷이 모두 흠뻑 젖었다. 11시가 되자 햇살이 더 본격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분명 그림자 안에 있는데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스페인의 햇살이란 이런 걸까, 씨스타를 왜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북쪽 지방은 보통 30-35도 정도로 아무리 뜨거워도 건조함 덕분에 더위를 견디기 어렵지 않다고 했는데, 오늘은 거의 38도에 육박하는 더위였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가장 더운 날이라 겸사겸사 일찍 숙소에 도착해서 쉴 수 있도록 목적지를 그리 멀지 않게 잡았다. 숙소에 도착해 앉아서 잠을 자다가 아니 잠을 청 하다가, 일기도 조금 쓰다가, 챙겨 온 하몽과 빵을 먹고 여유를 부리다 보니 체크인 시간이 되었다.

큰 산을 넘기 전에 유일하게 있는 알베르게였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체크인을 위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두 딸을 데리고 온 아빠가 눈에 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두 명의 딸과 함께 온 아빠였는데, 이 길을 따라온 딸들도, 딸들을 데리고 온 아빠도 참 대단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들 일행은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하였기에 결국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강렬한 태양에 걱정이 될 정도의 날씨였기에 부디 그들이 무사히 돌아갔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내내 북쪽 길에 온 것을 투덜거렸다. 오르막은 너무 힘들었고,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기대했던 풍경은 제주도 환상 자전거 길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물론 어제 데바에서 했던 수영은 참 좋았다, 그렇게 다시 수영할 수 있게 되면 그나마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하는 등산은 내가 원치 않았던 거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초콜릿 상자에 대한 명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다. 어떤 초콜릿이 들었는지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뭐 그런 대사였나,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순례길에 대해 선택한 결정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손에 집어든 초콜릿 상자가 어떤 것인지는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또 나는 직접 해보고나서야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외딴 알베르게에 였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신청해 사람들과 함께 먹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모두 활발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타터로 샐러드가 나온지 한참이 지나도 모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먼저 앞자리에 있는 덴마크 분들께 덜어드시겠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차차, 내 옆에 한자리 비어있는 의자의 주인을 모두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질급한 한국인은 그제서야 한명의 부재를 깨달았다. 늦게 도착해서 이제 막 씼고 나온 다른 순례자가 식탁에 도착하자 모두들 식사를 시작했다. 급할 게 없다는 것, 누구든 기다려주는 인내와 여유가 부러웠고, 이런 작은 문화를 배우는 것이 참 감사했다. 

스타터는 당근, 양파, 양배추 등이 푸짐하게 올라간 샐러드였는데, 특별한 드레싱 없이도 소금과 올리브유 만으로 참 맛있어서 신기했다. 샐러드를 거의 다 먹어가자, 알베르게 주인이 그릇을 가져가고 메인 메뉴를 놓아주었다. 감자와 치킨이 넉넉히 올라간 오늘의 메인은 보기에도 참 먹음직스러워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마쳐가자 덴마크에서 온 야콥이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음식을 한 접시에 모은 뒤, 차곡차곡 쌓고, 모든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가기 좋도록 정리했다. 내가 덴마크에 폴케호이스콜레를 하러 갈 예정이라는 얘기를 했던 터라, 나에게 이것이 덴마크의 문화임을 알려주었다. 그리 특별한 문화는 아니어도, 웨이터의 편의를 살펴주는 그들의 마음이 참 따듯하게 느껴졌다.

꿀이 들어간 후식까지 모두 야무지게 먹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러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우연치 않게 덴마크 사람을 세명이나 만난 나는 내가 가게 될 학교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코펜하겐에서 일을 하는 야콥은 전혀 가본적도 없는 곳이라고 하더라. 스스로 작은 나라라고 칭하는 덴마크(왠지 친밀감이 생기는 부분)에서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고 하니,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인보이스를 잘 보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털어놓았더니, 덴마크에서는 2주 전까지만 회계처리를 하면 되기에(?)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2주 전까지도 연락이 없으면 그 때 걱정하라고 말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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