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30 + 4 Fisterra
산티아고에서 보낸 하루마저도 나의 컨디션이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산티아고부터 피스테라까지 이어지는 5일 정도의 여정을 도전해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이미 떨어져 버린 에너지와 절정을 달리는 족저근막염으로 인해 나는 걷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밤늦게 다시 피스테라행 버스를 선택했다. 아쉬움을 조금 남기면 또다시 다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말이다.
피스테라에 도착하니 거짓말같이 날씨가 화창해졌다. 하늘은 다시 빛났고, 따뜻함에 모든 곳이 반짝였다. 낡았지만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알베르게에서는 화장실에서조차 빛이 쏟아졌다. 충만하게 평화로웠다.
아픈 발바닥을 겨우 달래며 누워있다가 잠시 일어나 근처를 산책했다. 북쪽길을 떠난 이후로 보지 못했던 넓은 바다와 맑은 물이 시원하게 눈을 채웠다.
특별하지 않은 아침과 평범한 점심은 내게 충분히 맛있었다. 거대하고 대단한 성취라던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반짝임보다 이런 잔잔함들이 더 마음에 드는 여행의 마지막 다웠다.
피스테라 숙소에서도 조금 더 걸어가야하는 곳에 정말 순례길의 끝, 0Km 지점이 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등산화보다 더 친숙해진 나의 슬리퍼를 신고 길을 나섰다. 자갈길에 종종 슬리퍼 속으로 들어오는 돌은 거슬렸지만, 그마저 마음에 들었다.
이 숫자가 이렇게까지 적어질 수 있다니, 걸으며 매번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무엇이든 계속 걷다 보면 끝은 있다는 것을 이렇게 경험해 가는 것이 내게 큰 배움이다.
순례길 후반부를 내내 함께 걸어온 프랑스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악화된 컨디션으로 예상치 못하게 여러 날을 쉬어야 했기에 그동안 함께 걷던 이들은 모두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고마운 우연이 겹친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아저씨는 정성스럽게 기억해 내는 몇몇 단어들로 말을 이어가다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그냥 내뱉곤 했다. 가끔은 너무 말이 길어져서 적당히 자리를 뜨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반가운 추억이 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저씨도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배탈이 나서 며칠을 고생했다고 하더라. 본인 이외에도 오랫동안 걸어온 사람들이 산티아고에 다다라 컨디션 난조를 겪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주었다. 괜스레 위안이 되었다. 사진 하나 같이 남기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워 인사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이라도 남겨두었다. 유난스럽지 않게,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던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0Km 지점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많아졌다. 버스와 차를 타고 관광을 온 이들이었다. 그들 속에서 절벽 위에 올라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대만큼 탁 트이고 넓은 바다였다. 특별하지 않아 더 오래 바라보았다. 드디어 세상의 끝, 순례길의 끝에 내가 왔구나. 도착했다는 성취감보다, 그 뜨겁고 젊은, 예쁜 날의 여행이 마무리되었다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지막을 기념하며 스페인 북부지방의 명물 뽈뽀를 먹었다. 먹을 때마다 감탄스러운 식감과 항상 기대이상으로 맛있는 파프리카 가루 + 올리브유의 조합. 탁 트인 테라스 자리에서 소소하고 만족스러운 사치였다. 자리를 옮겨 작은 튀김집에 앉았다. 감동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바삭한 오징어 튀김이었다. 이렇게 또, 무난히도 안 되는 게 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세상의 끝, 피스테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여정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