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17, 18 Desvio a Villamarco
*본 글은 ‘퇴사하고 산티아고 1’의 17,18일 차 글입니다.
이 멋진 건물에 머물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떼며 사진을 한 장 더 남기고 어두운 길을 나섰다.
해가 뜨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씩 벗는다. 프랑스 길은 밤이 되면 얇은 긴팔 긴바지가 부족할 정도로 춥다가도 해가 뜨면 살이 말라버릴 것처럼 해가 뜨겁다. 그렇게 오늘도 점점 옷을 벗어 가방에 매달고 걷다 보니 마을이 보였다.
과일부터 라면, 와인까지 작지만 알찬 슈퍼였다. 백색의 빛나는 머릿결을 가진 주인은 환한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해 주었다. 스페인 시골 슈퍼에서 라면을 팔다니, 주인은 한국인에게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내게 밝게 인사하며 자신이 한국인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감사합니다’에, 이어서 자신이 한국어를 하나 더 알고 있다며 ‘행복하세요’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이 ‘행복하세요’라니, 문득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 다음은 ’안녕하세요 ‘ 아닌가? 지구 반대편의 말을 딱 두 문장 아는데, ‘행복하세요’를 기억하는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단순히 꽤 많은 수의 한국인 순례자를 대상으로 장사하기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밝은 미소의 진심과 삶에 대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종종 귀여운 장면들을 발견하곤 한다. 사슴 주의 표지판에 그려진 유니콘 따위 같은 것들 말이다.
순례길에서 멀리 떨어진 알베르게로 가는 오늘은 아무도 걷지 않는 외딴 시골길을 조금 걸었다. 내내 넓은 밭이 펼쳐졌고, 햇살은 아주 뜨거웠기에 흙바닥에 떨어지는 스프링클러(가 아니라 작물들에게 물을 주기 위한 그것) 물줄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오늘은 걸으면서 새로운 생각들을 하고 싶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오늘의 질문’ 따위들을 스크롤하며 보고 있던 중에 가장 대답이 어려울 것 같은 질문을 골랐다.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단점은 무엇인가요?
그냥 단점은 너무 쉽다. 자기소개서를 여러 번 쓰면서도, 이런저런 일들에 부딪히면서도 나의 단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자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랑할 수 있는 단점이라니!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단점이 아니지 않은가, 단점을 사랑씩이나 해야 하나 등의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지만 길을 걷는 내내 생각해 보았다. 그나마 내가 귀여워해줄 수 있는 단점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단점들은 명확하다. 첫 번째, 꼼꼼하지 못하다. 아마 이건 내가 ADHD여서 일 확률이 크다. 작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덕에 이런저런 일들에 많이 부딪히기도 했지만 얻는 것도 많았던 발견이었다.
두 번째,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 안에서는 동기가 부족한 것들을 내내 피해 가지만 언제나 한계가 있다.
뭐 그 밖에도 내 단점을 나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정 사랑해야 한다면 아마 가장 첫 번째 단점이 낫지 않을까 싶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나름의 요령도 위안의 방법도 터득하고 있다고 위로한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사랑이라도 해버리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로 든든히 식사를 챙겨 먹고, 간식도 빼놓지 않았다. 순례길의 고단함으로 인해 살이 빠질 새가 없는 날들이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순례길로도 이어지지 않는 정말 일반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탁 트인 뷰는 어디에서 보나 정말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문득 계단을 올라가다가,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다가, 침대에 일어나 창문 밖을 보다가 ‘우와’하는 풍경이 이 특별한 여행의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아, 이 대단한 뷰의 숙소가 1박에 단돈 5유로였다. 방도 깨끗하고 숙소 전체적으로 정말 만족스러웠기에 연박을 하며 실컷 낮잠도 자고 밥도 든든히 먹었다. 대도시인 레온을 앞두고 있었지만 시골에서의 여유가 더 매력적이었기에 너무나 완벽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