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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Sep 24. 2024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순례길

순례길 Day 30 + 1, 2, 3 Santiago

갑자기 이틀이 흘렀다. 슈퍼에서 태평양 조개를 발견하고 반갑게 탕을 끓여 먹은 그날 밤,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컨디션이었기에 연박에 연박을 해가며 가만히 누워 이틀을 보냈다. 친절한 알베르게 주인은 아마 수돗물 때문일 거라고 말했지만, 이미 1달 넘게 수돗물을 마셔왔던 터라 갑작스러운 복통은 조개로 밖에 설명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방에 고이 모셔온 소염진통제를 몇 알 먹으며 자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어쩌면 배탈이난 것 이외에도 한 달 내내 이어진 일정으로 지친 몸이 쉬어갈 타이밍을 정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며칠 만에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청명했고, 오랜만에 과감히 고른 디저트는 입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어떻게 보면 척척 이어가던 순례길의 여정에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비극(?)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산티아고로부터 100KM 지점인 사리아에서 출발하는 그날부터 이미 호시탐탐 버스를 타고 점프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이제껏 걸어왔던 순례길에 대한 매력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의 반가운 '부엔 까미노'인사도 사라져 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이 상황에 대해 들으면 다들 한 마디씩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다 나았으면 조금 더 걸어보지", "거의 다 왔는데 아깝다", "다 와서 포기하는 건 좀 아쉽지" 등 그냥 상상만 해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검열들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그래서 더욱 버스를 타는 옵션이 매력적이었다. 남들의 시선, 평가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그저 나의 마음을 따르는 것. 북쪽길을 걷고 싶으면 누가 뭐래도 걷고, 프랑스길을 걷고 싶으면 다시 그 길을 걷고, 멈추고 싶을 때는 멈추는 것. 누가 뭐래도 정말 나의 길을 걷는 그 선택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길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기분이 째지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은 점점 산티아고 버스행으로 기울었고, 한적한 동네를 여유롭게 산책하며 그 생각을 곱씹었다. 예상치 못하게 오래 머무른 알베르게는 시설이 참 쾌적했다. 큼직한 로비에 주방은 부족한 것이 없었고, 침대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아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동안 종종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이곳에 머무를 때, 이렇게 쉬어가게 된 것도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3일을 머물고,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산티아고 행 버스에 올랐다. 나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걸었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누리며 즐겨왔기에 남은 미련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렸을까,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지도를 켜서 지금 있는 마을과 내가 어제 머문 마을의 거리를 확인했더니, 한 4시간쯤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태어나서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느꼈던 '탈 것'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빠른 교통수단을 두고 굳이 먼 길을 걸어내는 그 많은 순례자들의 결심에 거룩한 마음이 들었고, 내가 그 길에 함께 했음에 영광이었다.

그렇게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뜨니 산티아고에 거의 다 와있었다. 도시의 초입에 순례자들의 종착지를 알리는 여러 조형물들이 있었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가방을 들고 그 길을 지나는 순례객들이 눈에 보였다. 산티아고 푯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을 보고는 이제 정말 그 길 끝에 다다랐음을 실감했다. 사실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 마지막 날은 내가 딱히 고대하던 순간은 아니었기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내가 꿈꾸던 순간들은 그 30일 속에 조금씩 하루하루 녹아져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추로스 가게로 향했다. 대단한 산티아고 대성당이 아닌 추로스 집에서 차갑고 진한 라테를 마시며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을 실감했다. 성당 대신 추로스를 먼저 선택한 그 순간마저도 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있었던 청개구리 정신이 지구 반대편 스페인까지 와서 꽃을 피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에야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날은 적당히 흐렸고, 광장에는 순례길의 완성을 음미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누워서 한참 동안 성당을 바라보는 이도, 함께한 일행들과 시끌벅적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상기된 광장의 분위기와 다르게 생각보다 덤덤했다. 성당은 거대했지만 순례길을 걸으며 마주한 부르고스 성당의 위엄보다는 덜했다. 그 긴 길 끝의 마침표라는 대단한 의미가 너무 거창했던 걸까. 그저 그동안의 길을 떠올리고 마무리를 추억하기에는 충분했다.

산티아고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완주 증서를 받았다.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부터 걸어온 흔적인 크레덴시알의 도장들로 채워져 있었고, 사무실 직원분의 간단한 검증을 마치고 증서가 발급되었다. 출발지와 일자 그리고 산티아고 도착 일자까지, 그동안의 여정이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해줄 얇은 종이가 한 장 내게 왔다.

덤덤하게 증서를 받아 들고, 산티아고 도착을 고대하던 또 다른 이유를 찾아 길을 다시 걸었다. 구불구불 멋진 옛날 건물들과 한국의 편의점만큼 많은 순례길 기념품점들을 지나 도착한 그곳은 바로 아시안 마트였다. 긴 길 끝의 노곤함을 녹일 라면 봉지를 손에 잡아들고 계산대로 향하다가 다시 멈추어 김치를 찾아 나섰다. 한국이었다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캔김치를 보고 군침을 삼키다가 냉큼 집어 숙소로 데려왔다. 그 무엇보다 완벽한 산티아고의 저녁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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