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움을 만들고 싶었던 첫 동기
갇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본가에서 약 3시간 떨어진 시골 기숙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 간 학교는 농어촌 특별전형이 가능한 곳이었고 명문대 진학률이 높았다. 11살 어린 쌍둥이 동생이 있는터라, 학구열 높은 기숙학교에서 수험생활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전학을 계기로 처음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10년 지기 단짝 친구들과도 서운한 이별을 해야 했다.
첫 타지 생활은 힘들었지만, 지금까지도 높은 적응력과 독립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전학 가기 전 학교와 전학 간 학교의 온도차는 뚜렷했다. 전학 가기 전의 학교는 뾰족한 경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 함께'가 중시되다 보니 '개인'의 관점이 어색했다. 문구점을 갈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친구들과 짝을 지어 다녔다. 하지만, 전학 간 학교는 철저한 개인주의였고 개인 생활이 너무나 뚜렷했다. 개인주의가 너무 어색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한 척했다. 아이들은 식당에서 단어장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은 기본이었다. 전교생 95%가 수업이 끝나면 자습실로 갔고 자정까지 자습을 하고 다 같이 기숙사로 이동해 취침했다. 겉으로는 빠르게 경쟁 분위기에 적응한 것처럼 보였으나, 마음 어느 한 구석에서는 답답함을 느꼈다.
교내 규정은 빡빡했다. 일례로, 교내 휴대폰 사용은 금지되었다. 휴대폰 사용이 적발되면 시골에서 자취방을 구해 1달을 지내야 했다. 공중전화를 통해, 공중전화 카드로 외부에 전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전학 후, 마음이 힘들었는지 하루를 빼먹지 않고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조금씩 적응할 것 같으면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버렸다.
나는 두 차례 도벽 사건을 겪었다.
전학 오기 전에 아주 큰 도벽 사건으로 학교를 뒤엎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잠깐 풀고자 한다. 전자기기, 현금이 계속 없어지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학생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학교 분위기는 엉망이 되어갔다고 한다. 아이들은 손버릇이 좋지 않은 아이들의 명단을 만들고 서로 의심하고 추론하기 바빴다. 몇 개월간의 빗발친 항의에 학교 관계자는 기숙사를 샅샅이 살펴봤고 한 학생의 캐리어에서 노트북, PMP 10대 이상, 현금 50만 원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 학생은 전교생 모두에게 사과를 하고 전학을 갔고 이후에 학교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었다.
큰 사건으로 도벽 사건은 잠잠해졌으나 공교롭게도, 나는 이후의 두 차례 도벽 사건의 타깃이 되었다.
첫 번째 사건은 얼굴만 아는 A가 옷을 훔쳐간 일이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옷은 찾았으나, 옷을 찾아준 친구는 A와 친한 사이였기에 누가 훔쳐갔던 것인지는 덮어두고 싶다고 했다. 다음 해, 우연히 A와 짝꿍이 되었다. A와 나는 꽤나 친해졌고 서로의 비밀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짝꿍이 되고 한두 달쯤 지났을까, A는 그 옷을 훔쳐갔던 것은 본인이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항상 미안했다고 진심을 다해 나에게 사과했고, 사건의 발생은 서로를 알기 전의 일이라 나 또한 진심을 다한 사과를 받아주었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도, 온전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다.
두 번째 사건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친구가 생활복을 훔쳐간 일이었다. 빨래 후 건조대에 널어놓은 생활복을 찾기 시작하자 B는 거짓말을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B가 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B는 후배에게 빌린 것이라며 후배와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했다. 후배가 진실을 말하며 정황이 발칵되자 B의 태도는 180도 변했고, 부디 덮어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진정한 사과보다는 이 상황을 잘 넘기고 싶다는 모습을 보였다.
도벽 사건 이후, 강제전학 조치를 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모든 선생님들은 모두 적당히 넘어가길 바랬다. 나도 B가 강제전학을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한 사람과 가족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싶지는 않았으니.
이 사건 이후, 사감 선생님과 교감선생님과 몇 차례 대화를 나누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들의 무심함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졌다. 내가 겪은 일은 이 일은 세상의 다른 험난한 일보다 별거 아닌 일로 정의되었고, 중요한 고등학교 3학년 시기에 크게 만들면 안 되는 일이 되었다. 어른들의 공감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심하지 않기를 바랐던 건 욕심이었다.
답답한 것이 많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김수영 작가의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 책을 읽으며 작가님처럼 세계로 다니고 싶다고 꿈꿨다.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업계에서 일하고 싶었고 이 나라 저 나라 훨훨 다니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람대로 날개를 달아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무엇이 그토록 동력을 만들었는지 나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다채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의 일부는 무기력함과 답답함에서 비롯되었다.
* 이 이야기를 에필로그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의 20대 행복한 도전이 결핍과 답답함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 싫었고 쓰면서도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20대 이야기를 꺼내기엔 2% 부족하여 프롤로그로서 꺼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