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만의 방에서의 기록
이제부터 아빠를 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철이와 나는 아빠와 딸의 관계라기보다는 동등한 여행메이트처럼 다녔다.
생각해 보면 철이(아빠)와 정이(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해줄게”라고 말하지, “아빠(엄마)가 해줄게”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관계를 아빠와 딸이라는 단순한 관계로 정의하지 않게 된 아주 큰 계기였던 것 같다.
(글에서는 철이와 정이라고 쓰는 건 가능하다고 확인받았다. '철이'와 '정이'라고 실제로 불리는 것은 엄마, 아빠가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여 포기.)
중 고등학생 때 감사하게도 장학생으로 캐나다와 미국에 잠깐 홈스테이로 살아 볼 경험이 있었다. 가족끼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쉽고도 간편한지. 거기서 깨달았다. 역할에 한 사람을 가두어 버리기보다 그 존재로 남겨두기*.
철이는 로마에서 핸드폰을 도둑맞았다. 약 15일간의 여행 기록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핸드폰 잃어버린 이야기는 따로 한 편으로 써 볼 예정)
우리의 스케줄은 언제나 오후에 한 텀 쉬는 시간이 있었다. 오전에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1-2군데를 들려 진득하니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온다. 샤워를 하고 철이는 일기를 정리한 이후, 낮잠에 든다. 핸드폰이 없어졌을 때 철이는 그 속에 든 사진과 기록을 가장 아쉬워했다.
철이는 딱 반나절. 핸드폰이 없어진 것에 대해 머리 아파하고선 낮잠에 빠졌다. 그러곤 바로 다시 일어난다. 로마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종이를 몇 장 부탁했다. 수첩이나 노트도 필요 없다. 책상에 앉아 a4용지에 그날의 기록들을 써 나간다.
철이는 35년 한 직장에서 일하다 퇴직했다. 퇴직 영상 인터뷰 질문. 철이의 보물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매년 쓴 철이의 노트를 보여준다. 기록도 습관이니라. 기억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어디를 여행하나 그 자리를 자기만의 방으로 만드는 철이. 여행메이트에게 참으로 많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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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하다가 찾게 된 책. 이성민 저자의 [말 놓을 용기] / 믿음사
*글에서 아빠라고 쓰는 것보다, 철이라고 쓰니 훨씬 편하다. 파파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찝찝한 기분이었는데. 아주 상쾌해졌다. 소설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처럼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철이의 앞으로의 모습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