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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안 Oct 15. 2022

야살스러운 복숭아가 취향

<popping rabbit>




몰캉몰캉 물 많은 복숭아가 취향입니다. 나의 멀바우 식탁에 앉아 복숭아를 꺼냅니다. 껍질은 깎는다기보다는 거의 벗겨내다시피하고 온전한 그대로 한입 베어 뭅니다. 뭉근하게 들어오는 복숭아 속살. 손목 안쪽으로 복숭아 과즙이 흘러내리는 걸 놓치지 않고 입으로 훑어내고는 손 까지 쪽쪽 빨아대고, 또 한입 야살스럽게 베어 뭅니다.


이렇게 먹는게 취향이지만 많은 사람들 앞이라면 딱딱한 복숭아를 선택하는게 좋을 일 입니다. 얌전히 깍아서 포크로 콕 찍어 반 입씩 오독오독 흘리지 말고 먹어야지요. 취향은 아니지만 그게 예의를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람들의 눈 앞에서 솔직한 취향은 곧 잘 나빠지기도 하니까요.


사람다운 매너를 위해 딱딱한 복숭아들을 골라 담았습니다. 몸에 붙지도 너무 넉넉하지도 않은 정직한 핏. 무릎을 가리우는 치마. 속옷이 비치지 않는 셔츠. 귓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적당한 크기의 귀걸이. 피부색과 가까운 구두. 눈을 감고 아무거나 골라 매치해도 어긋남이 없는 무색무취의 경건한 옷장. 입사 10년 차의 옷장입니다.


저마다 특별한 털 옷과 피부색을 지닌 동물의 세계에 비하면 명도와 채도만 조금씩 조절 된 흙빛을 지닌 인간의 세계. 인간들은 덕분에 무리마다 특유의 복식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어떻게 입느냐는 무리를 구분 짓는 중요한 척도. 이제 갓 성체가 되어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새끼 인간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합니다. 무리의 장로들이 다가와 이 새끼 인간을 위 아래로 훑습니다.


무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 새로운 사회화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둔해빠져서 “어머 대학생 같네”하는 말이 딱히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무리에 적응 하는데 다소 실패로군요. 직장에서 산행을 함께 하던 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갔던 저는 등산복과 등산화가 아니라는 사유로 한소리 얻어듣고서야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튀는 구나.


이후로 보호색을 사 모았습니다. 주변을 살피고 나를 살펴서 비교되지 않도록 색과 결을 맞춥니다. 취향은 취향일 뿐.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목표. 덕분에 쇼핑은 간소하고 경제적인 편으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필요에만 최적화된 동선. 고민은 크게 필요치 않습니다. 답은 적당하니까요. 취향까지 고려해 두 벌을 사기에는 돈이 모자랍니다. 공연히 마음이 흔들릴 바에야 어차피 사지 못할 나쁜 취향대신 애초에 옳은 취향으로만 발걸음. 그렇게 입사 10년차의 옷장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그 옷 무덤 속으로 묻혀버린 취향은 영정사진 하나 남길 새 없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많은 영혼이 남아 잠든 저를 올라타고 가위를 누릅니다. 딱딱해진 몸. 딱딱해진 생각. 딱딱해진 일상.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초록은 동색인 양 숨어 앉아 눈알만 굴리는 건전한 인생. 그렇게 변해버린 나에게 이건 악몽이라고 제대로 일깨웁니다.


그저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말랑한 복숭아. 잃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말랑한 복숭아를 집어 삼키던 나의 야성. 남을 섬기는 우아한 태도 대신 최대한의 극치를 맛보겠다는 이기심. 그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삶의 공간마저 남들로 가득차 나 하나 설자리 없게 되어버린 우를 범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취향의 재탄생을 도모합니다. 나쁜 취향은 오로지 제 입맛에 딱입니다. 있는 힘껏 제 눈에 예쁠 작정입니다. 더 이상 초록의 숲은 적성이 아닙니다. 들판으로 나가 적들의 눈에 띄라지요. 까짓거 목을 내어주고 나로서 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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