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나 이번에 회사를 하나 맡게 됐어.”
“토니~ 축하해. 그 회사 주력 제품이 뭔데?”
“음.. 그게 귀리 음료.”
“귀리 뭐? 그따위 걸 누가 먹는다고? 고생길이 훤하다. 행운을 빌어, 토니.”
“존,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
“아냐, 난 괜찮아. 아무도 먹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귀리 음료 먹어보면 생각보다 괜찮아. 다시 한번 생각해봐.”
고심 끝에 존이 말했다.
“토니,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마케팅 부서를 죽이게[Kill] 해줘.”
토니의 대답이 이어졌다.
“Sure, 그러지 뭐.”
귀리 음료 ‘오틀리’의 대표로 취임한 토니 패터슨이 절친인 존 스쿨크래프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을 하면서 나눈 대화다. 귀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존은 일언지하에 거절한 걸까? 그리고 무슨 억하심정으로 마케팅 부서를 없애야만 합류한다고 한 걸까? 이제부터 유업계를 긴장하게 만든 오틀리의 성장 배경을 한번 알아보자.
우유 등 유제품은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주요 영양원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많은 사람이 유제품에 포함된 유당 소화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마트에서 유당이 제거된 락토프리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아토피 등으로 인해 우유나 두유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유용하지 않다.
1993년, 이러한 시장 상황을 인지한 스웨덴 룬드 대학교의 리커드 아스티 박사가 주축이 돼 15년간 연구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귀리의 모든 영양 요소를 온전히 담은 귀리 음료를 개발하였고 오틀리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첫 출시 후 20년 동안은 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유와 비슷한 식감과 맛을 기대한 소비자들에게 오틀리는 어슴푸레 우유를 모방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음료에 불과했다. 하지만 토니와 존이 오틀리에 합류하면서 오틀리는 전혀 바른 브랜드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앞서 존이 오틀리의 합류 조건으로 마케팅 부서의 해체를 요구했다. 잔인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존의 배경과 당시 오틀리의 상황을 고려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존은 DDB와 같은 세계적인 광고 회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하였고 직접 마케팅 에이전시를 운영한 경험도 있다. 그런데 광고주의 니즈에 맞춰 크리에이티브를 제안하는 마케팅 에이전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다. 기껏 머리를 쥐어 짜가며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브랜드 담당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담당자의 동의와 함께 진행하다가도 경영진의 반대로 허사가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존은 자신의 좋은 아이디어들을 광고주였던 마케팅 부서 담당자들이 망쳤다며, 이번이 어쩌면 그간의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이 역시도 구태의연한 기존의 틀을 거부하는 악동 같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더욱 견고히 하고픈 그의 의도가 담긴 발언으로 보인다. 당시 오틀리는 밋밋한 패키지 디자인에서 유추할 수 있듯 트렌디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성장이 정체된 변변찮은 음료 회사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존이 합류하는 전제 조건으로 마케팅 부서 폐지를 요구한 건 즉 브랜딩에 대한 권한 이양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토니는 존에 대한 신뢰가 깊었기에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국내 기업이라면 가능했을까?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기업들의 수장 중 권한 이양에 대해 열린 사고를 하는 경영진은 극히 드물었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오틀리의 시작은 유당불내증으로 인해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우유 대체품이었다. 하지만 토니와 존은 그것만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명백하고 고리타분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오틀리는 주원료인 귀리가 우유와 비교해 1/5 수준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생산 과정에서 적은 양의 물과 토지가 이용되는 점을 들어 인간과 자연에 모두 이로우면서 지속 가능성에 중점을 둔 친환경적인 브랜드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다행스럽게도 트렌드의 변화도 오틀리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기뿐만 아니라 우유 같은 동물성 식품마저 일절 먹지 않는 비건(vegan·채식주의) 문화 확산과 함께 건강을 중시하는 웰빙(well-being) 식품들이 크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한 예로, 국내에서는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나뚜루가 국내 최초 비건 인증 순식물성 아이스크림을 출시하였다. 오틀리는 특허 받은 제조 공법을 통해 영양소가 온전한 귀리 음료에 칼슘과 비타민을 첨가한 것이 전부여서 비건과 채식주의자도 섭취할 수 있다.
오틀리의 브랜드 리뉴얼과 함께 적극적인 홍보가 스웨덴에서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스웨덴 낙농 협회의 묵직한 견제구가 날아왔다. 오틀리가 사용한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174페이지 분량의 소송을 제기했다. 우유와 귀리 음료의 제조 방식을 비교한 일러스트레이션 내 화살표의 위치를 문제 삼았다.
화살표가 소의 젖이 아닌 항문 근처여서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며 ‘기만적 광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애플 기업의 로고를 보고 청량리 청과물 시장으로 오인할 수 있다는 억지와 다를 바 없다. 다른 기업 같으면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거대한 협회의 협박에 굴복했겠지만 오틀리는 달랐다. 오틀리는 착한 기업을 표방하면서도 똘끼와 배짱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틀리는 소송 건에 대한 내용을 온라인에 모두 공개하고 스웨덴의 모든 조간신문에 유료 광고를 집행하였다. 광고의 내용은 낙농 협회가 오틀리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자 금전적 우위를 이용하여 고소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승화하는 기지를 발휘했고 스웨덴 내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이자 브랜드로 빠르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오틀리의 옥외 광고 사례를 보면 소비자들이 어떤 콘텐츠에 반응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오틀리는 기업 역사상 가장 비싼 광고를 집행하며 더 높게 비상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귀리 음료 브랜드 ‘오틀리’의 대표 ‘토니’가 귀리가 가득한 밭에서 오만상을 쓰고 일렉트릭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영상이 시작된다.
가사를 들어보자.
직역하면 ‘우유 같지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지’. 촌스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브랜드의 정체성과 차별화를 한 줄에 모두 말끔하게 담아낸 것 같다. 무엇보다 대표가 미성의 소유자도 아니고 5옥타브를 넘나드는 기교를 보이는 것도 아닌, 되려 고음에서 갈라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위한 인위적이지 않은 귀리 음료를 표현하기 위해 더욱 인간적으로 연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가사가 꽤 흥미롭다.
직역이 필요 없다. 우리나라였으면 낙농업 종사자들한테 소똥 테러를 당할 수 있는 초 직접적 디스이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광고 송출이 불허되었다. 그러나 정작 광고가 송출된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전 세계적으로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 슈퍼볼(Super Bowl)에 광고를 내보냈다. 슈퍼볼은 미식축구 팬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모여 보는 전국적 행사다. 시청률이 40%가 넘는데, 대한민국 안방을 점령했던 ‘태양의 후예’가 시청률 38.8%를 기록했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치다. 심지어 땅덩어리가 50배 이상 큰 미국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 광고 구좌를 놓고 미국 소비자들에게 단기간에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려는 기업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뜨거운 호응에 걸맞게 비용은 1초당 2억으로 30초 광고 송출 시 60억이다. 2021년 슈퍼볼 광고에는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세계적인 주류 브랜드 버드와이저는 37년 만에 처음으로 광고를 중단하였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는 역시 손님이 줄고 음식점들이 줄줄이 폐업하며 외식 산업이 전체적으로 흔들리자 올해 불참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광고 구좌를 귀리 음료 브랜드 오틀리가 한 자리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대표의 생목 라이브를 내보냈으니 이 얼마나 기가 차면서도 신박한 발상인가?
‘카우’와 ‘와우’를 라임으로 엮어 반복해서 부르는데 소를 키우는 것이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기술하는 백여 편의 논문과 그 어떤 메이저 언론 뉴스보다도 더 깊고 진하게 귀와 뇌를 잠식한다. 영화 ‘옥자’가 생각나는 것은 괜한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항생제 사용, 유전자 선택, 사료 변화, 성장 호르몬 사용을 포함한 다양한 인위적인 사육 기술이 우유 생산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꼬집으려는 듯하다.
무식하고 무심하게 촬영한 듯하지만 ‘우유=인위적인’이라는 연출 의도는 선명하게 전달된 것 같다. 무스로 곱게 뒤로 넘긴 토니의 머리가 그나마 가장 산업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건반 위에 올린 오틀리 패키지와 컵에 따른 귀리 음료. 정말 단순한 이 설정이 오틀리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토니의 티셔츠에 프린트된 문구조차 재치가 돋보인다. “No artificial badness” – “나쁜 인공감미료는 없어”. 그리고 광고 송출 후 여론의 호불호가 크게 갈리자 기다렸다는 듯 ‘난 그 오틀리 광고가 싫어’라는 문구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이 모든 걸 기획하고 실행한 오틀리의 대담하면서도 단순 무식한 전략이 최근 퍼포먼스 마케팅을 접목한 이커머스 판매 증진에만 몰입할 수밖에 없는 현 세대 마케터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이렇게 지속 가능성과 친환경의 아이콘으로 환골탈태한 오틀리는 2020년 약 2.4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고 10%에 해당하는 2,4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사모펀드 운용사 블랙스톤의 주도하에 투자를 유치했는데, 스타벅스의 명예 회장 하워드 슐츠를 비롯해 오프라 윈프리 그리고 유명 래퍼이자 사업으로도 성공한 제이지 등 유명 인사들이 투자에 참여하였다. 다만 블랙스톤의 투자는 오틀리의 고객들과 환경운동가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블랙스톤은 아마존 내 산림 벌채와 도로 개발 등 자연 친화적이지 않은 행보를 한 기업에 투자한 이력이 있었는데, 오틀리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과는 거리가 꽤 있어 보였다. 이상과 현실은 일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례인 듯하여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틀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다. 2019년 2억 달러(약 2254억 원)였던 매출은 2020년에는 4억 달러(약 4,508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자인 하워드 슐츠의 영향인지 스타벅스는 미국 내 매장에 오틀리 귀리 음료를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틀리는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마케팅 부서를 해체하고 조직의 의사 결정 과정을 최대한 단순화한 것이 컸다.
위의 마케팅 의사 결정 과정을 보면 화살표가 모두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즉 처음부터 대표를 포함해 전략을 세우고, 그다음 바로 집행하는 구조이다. 때론 거칠지만 디테일이 살아있고 날 것처럼 신선한 그들의 전략은 아마도 이러한 조직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틀리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오틀리 광고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은 사람은 적을 것이다. 거침없고 개성 있는 브랜드가 무엇인지 보여준 오틀리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국내 식품 업계도 기존의 불문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시각과 독특한 색깔이 짙은 브랜드가 더욱 많아진다면 마트 장보기를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워질 것 같다.
해당 콘텐츠는 Jimmy Cho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