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분석 컨설팅 회사에서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마크.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늘 피곤하다는 것. 일이 몰리는 시즌이나 그렇지 않은 시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항상 피곤했고 해결책은 요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크는 애플에서 도입하고 있는 재량적 리더십(discretionary leadership) 모델을 접한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현재 자신의 상황을 모델에 적용해봤다. 놀랍게도 바로 문제가 보였다. 자신의 업무 시간을 100이라고 했을 때 마크는 담당업무 30, 학습업무 10, 교육업무 10, 그리고 나머지 50은 위임업무에 할애하고 있었다. 위임업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피곤함의 도돌이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시간과 노력의 레시피를 조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얼마 전 내가 리딩하는 직장인 성장 커뮤니티 HFK의 ‘글로벌 탐구’ 세션에서 애플의 혁신형 조직체계와 리더십에 관한 아티클을 다뤘다. 아티클 내용 중에 모든 참가자가 공감했던 한 가지 모델이 있었는데 바로 재량적 리더십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한 이후 애플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깊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담당 기능의 디테일에 집중하고, 협력적인 태도로 토론할 줄 아는 리더”였다. 하지만 애플은 지난 20년간 매출로 보나 직원 수로 보나 급성장했고 이로 인해 고위 리더들은 더 많은 일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이에 변화가 필요했고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재량적 리더십이다. 비단 고위 리더뿐 아니라 중간 리더들, 나아가 주니어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인트로에서 언급한 데이터 분석 컨설팅 회사의 리더인 마크의 상황을 재량적 리더십 모델에 맞게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마크의 전문 분야는 주요 프로젝트 품질 관리와 대기업 고객 관리 그리고 회사 운영 관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의 그 누구보다 경력이 있고 또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 회사 역시 이 부분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마크를 영입했다. 물론 해당 업무는 마크 혼자서 할 수 없으며 프로젝트팀과 재무팀 그리고 CEO와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마크의 주요 성과 지표(KPI) 역시 이 담당업무가 7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담당업무 박스가 점점 넘쳐 나고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 트렌드에 따라 여러 기술 플랫폼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솔루션에 대해 고객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해당 부분 역시 마크의 담당업무가 되었다. 당장에 매출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향후 먹거리로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어서 간과할 수 없었고 팀을 만들어 회사가 현재 수준에서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들어야 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회사 운영 관리 업무 역시 일들이 넘쳐났다. 채용 건수가 작년에 비해 배 이상 증가하면서 더 이상 서류 하나하나에 신경 쓸 수가 없었고, 팬데믹으로 인한 재택근무 활성화로 인해 회사 운영과 프로젝트 운영에 필요한 여러 툴들을 도입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마크는 담당업무 박스에 있는 업무 중 일부를 교육업무 박스로 옮기기로 했다.
교육업무라고 해서 강의실에 사람을 앉혀 놓고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크 본인이 전문성을 충분히 갖고 있지만 더 이상 담당업무에 두지 않고 다른 담당자를 세우고 그들에게 정확한 지침과 피드백을 줘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춘 결과물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제임스: 마크, 다음 달에 A사 계약 갱신 관련해서 제안 보고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아젠다는 지난 계약 기간 동안 주요 결과물 소개, 새롭게 1년 간 진행할 프로젝트 제안, 마지막으로 계약 갱신 관련한 베네핏 등 크게 세 개 파트로 준비하려고 해요. 이와 관련해서 피드백 요청드려요.
마크: 우선 제임스가 생각하고 있는 아젠다는 우리 회사가 계약 갱신 제안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맷인 것은 맞아요. 안전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A사가 올해 재계약을 하면 4년째 계약이라 내부 지침상 3년이 초과하는 계약은 굉장히 까다롭게 심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선은 A사의 장기 거래처 심사 기준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으면 그것에 맞춰 준비하는 노력도 필요해요. 제가 아는 한 가지는 ROI (투자 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입니다. 컨설팅 프로젝트 특성상 우리의 ROI를 수치화한 경험이 많지 않겠지만 A사가 지금까지 프로젝트에 투입한 금액 대비 얼마나 많은 유형, 무형의 수익을 거뒀는지에 대해 심플하게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 거예요.”
이런 피드백은 회사에서 마크 이외에 다른 리더들이 가르치기 어려운 것들이다. 마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10%의 시간을 들여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반대로 마크가 배워야 하는 업무들도 많다.
어제의 전문가가 오늘의 전문가가 아닐 수 있다. 회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플랫폼은 구글 제품이다. 하지만 고객사 중에 특정 고객사는 어도비 제품을 고집했다. 엄밀히 따지면 구글과 어도비 제품 모두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구글 제품은 사용하기 쉽고 하루 정도 교육만 받으면 디지털 마케팅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반면 어도비 제품의 경우 일주일 정도 비싼 돈을 내고 교육 받아야 하는 큰 불편이 있었지만, 강력한 분석 기능을 제공해서 디지털 마케팅이 어느 정도 성숙한 조직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마크 역시 구글 제품에는 익숙했지만, 어도비 제품을 가지고는 한 번도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도비 제품도 구글 제품만큼 알아야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시장이 변하고 있었다. 이에 마크도 어도비 제품을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다행히 회사에는 어도비 제품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3명의 직원이 있었고, 마크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일주일에 반나절씩 교육을 받았다. 마크의 목표는 6개월 안에 해당 업무를 학습업무 박스에서 담당업무 박스로 옮기는 것이다.
담당업무, 교육업무, 그리고 학습업무만 생각하면 마크는 일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시간의 절반을 잡아먹는 업무가 있었으니 바로 위임업무였다. 재량적 리더십 모델에서 위임업무 박스의 위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리더 자신이 전문지식이 낮으면서 디테일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업무들이다. 그런데 마크는 그런 일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있었다.
“마크, 내일 오전에 C사 프로젝트 현황 공유 미팅 잡아도 될까요? 이슈 사항도 있어서 팀원들이 마크랑 미팅을 요청하네요.”
“마크, 이번 분기 PR 활동 계획 관련해서 내일 에이전시와 미팅 있는데 참석 가능할까요? 의사 결정해야 할 사항도 있고, 에이전시 대표가 오랜만에 인사도 드리겠다고 해서요.”
“마크, 이번에 구매 예측 모델링 프로젝트 관련해서 팀들 사이에 이슈가 있어서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에요. 오후에 줌 미팅하기로 했는데 들어와서 양쪽 이야기 듣고 의사 결정하는데 도움 줄 수 있을까요?”
“마크, 지난번에 맡긴 D사 제안서 관련해서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도 고객사 니즈에 맞춰 그림을 그리기가 힘드네요. 다음 주 월요일에 관련 멤버들 다 같이 모여서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보기로 했어요. 와서 저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혹시 없는지 검토해줄 수 있어요?”
직원들이 개입을 요청한 C사 프로젝트, PR 활동, 구매 예측 모델링 프로젝트, D사 제안서 작업 모두 마크가 특정 팀 또는 인원에게 위임한 업무들이다. 위임의 정의가 무엇일까? 애플에서는 팀을 만들어 목표에 합의하고 진행상황을 모니터링 및 검토하고 팀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위임이다. 따라서 책임은 철저히 위임받은 인원들이 진다. 마크가 해야 할 일은 진행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검토하는 일뿐이다. 그런데 마크는 선 긋기를 잘하지 못했다. 다르게 말하면 믿고 맡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위임업무에 나서서 관여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팀원들도 자발적으로 진행하기보다 중요하다 싶으면 항상 마크를 찾았다.
문제는 이렇게 위임해서 맡긴 업무들이 10가지가 넘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본인에게 중요한 담당업무와 학습업무에 시간을 많이 투입하지 못하게 됐다.
비단 마크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의 대부분 임원들은 위임업무 박스를 가득 채운 채 직장 생활을 한다. CEO나 오너로부터 지시 받은 업무가 대부분 위임업무 성격인 탓도 있지만 자신이 재량껏 시간과 노력을 조율하지 못한 탓도 없지 않다.
마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판단하고 나서는 재량적 리더십 모델에 따라 어떤 변화를 줘야 할지 고민했다. 애플의 경우 리더는 담당업무에 40%, 학습업무에 30%를 사용하고 나머지 교육업무와 위임업무에 각 15%를 사용한다. 물론 본인이 맡은 비즈니스와 시기에 따라 편차는 있다. 마크는 실험적으로 담당업무 비중을 30%에서 40%로, 학습업무와 교육업무 비중을 10%에서 20%로 늘리고, 마지막으로 위임업무 비중을 50%에서 20%로 대폭 줄여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방향이 회사 입장에서도 또 본인 입장에서도 윈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위임업무 비중을 대폭 줄였다. 특정 팀과 인원에게 업무를 위임할 때부터 의사소통을 분명하게 해서 책임과 권한을 확실하게 주고 그에 따른 성과 보상까지도 못을 박았다. 그리고 마크는 프로젝트 대시보드를 통해 모니터링하고 한 차례의 중간보고를 통해 검토하는 것에만 관여하기로 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해당 업무를 진행하는 팀장이 이전보다 더 책임감을 갖고 프로젝트를 리딩하기 시작했다. 마크에게 위임업무였던 것이 해당 팀장에게는 담당업무였다. 그렇게 해당 팀장은 회사 내에서 그 누구보다 해당 프로젝트의 전문가로 성장했다.
학습업무를 배로 늘린 것이 마크 입장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일주일에 반나절 교육받던 A사 제품 관련 학습 내용을 실제 프로젝트 사례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 결과 처음에 6개월로 잡았던 기간을 4개월로 단축시켜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큼의 전문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메타버스에서 디지털 마케팅의 성과를 측정하는 분야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다.
HFK 글로벌 탐구 세션에 참석한 멤버들이 공감했던 내용 중 하나는 재량적 리더십 모델이 꼭 고위 리더뿐 아니라 중간 관리자나 주니어들도 적용하고 고민해볼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100이라는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와 커리어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지를 판단해보자.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어느 곳에 더 투입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최적의 조합인지를 생각해보자.
여기 주니어 직원이 있다. 그에게는 위임업무가 없다. 반대로 위임받은 업무, 즉 담당업무가 90을 차지한다. 일을 열심히 하고 뒤돌아서면 새로운 일들이 쌓여 있어서 다른 업무를 할 마음에 여유조차 없다. 나머지 10은 학습업무에 사용한다. 3년 뒤에 본인이 맡고 싶은 디지털 마케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분석 툴에 대해 틈틈이 배우고 있다.
문제는 주니어 직원에게는 시간과 노력을 조절할 재량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는 본인뿐 아니라 팀장이나 중간 관리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선 담당업무 중에서 본인이 메인을 가져가지 않으면서 발만 담그고 있어서 미팅에만 참석하는 업무는 과감히 배제해줄 수 있다. 아울러 단순 반복 업무 중에 중복 업무가 있다면 과감하게 하나를 제거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고 내용이 겹치는 업무에 대해서는 상위 보고만 살리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줄인 시간을 학습업무에 좀 더 투입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학습했을 때 ROI가 가장 높은 포지션은 임원도, 중간관리자도 아닌 바로 주니어 직원들이다. 그들의 학습업무 박스를 채워주는 것 역시 리더의 재량적 리더십일 것이다.
재량적 리더십의 가이드라인은 없다. 담당업무, 학습업무, 교육업무, 위임업무의 황금비율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현재 상황이 어떤 지 점검해보고, 회사와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최적의 조합인지를 살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자세다. 네 가지 업무 모두 다른 직원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나의 작은 노력이 나뿐만 아니라 내 부서를, 나아가 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Mark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