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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Dec 13. 2023

망한 왕국의 왕

 아프다. 남들 아프다는 얘기가 듣기 지겨워서 나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막상 아프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적당히 아프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되게 아프다. 기침할 때마다 기관지에서 가래로 가래를 퍼 올리는 것처럼 가슴께가 쓰리다. 바람만 불어도 누가 머릴 걷어차는 느낌이다. 어젯밤부터 입고 있는 내복은 하도 땀을 흘려서 막 지린내가 난다. 두피엔 평소보다 개기름이 두 배는 더 흐른다. 덕분에 없는 머리숱이 더 없어 보인다.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동네 가정의학과를 찾았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감기 같은데요.

 그런 말은 나도 하겠네.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누르고 의사에게 싱긋 웃어 보인다. 네, 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약발이 들면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병원 건물 1층 약국으로 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사인지 격투기 선수인지 모를 사람이 하나 서 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쭉 째진 눈, 키는 나랑 주먹 하나 차이 나는 걸로 보아 195센티쯤 되는 것 같다. 운동을 하는지 가슴둘레도 150센티는 넘어 보인다. 어쩐지 위압감이 들어 공손히 두 손으로 처방전을 건넨다.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아픈 게 얼마 만인지. 작년에도 이렇게 아팠나. 그렇다면 아프다고 티를 내기도 어렵다. 한 삼 년 만에 아팠으면 아이고 죽겠소, 오랜만이니 내가 죽상을 하고  침대에 퍼질러 누워 있어도 좀 봐주쇼라고 얘길 할 텐데 1년은 좀 짧다.

 계산해 드릴게요.

 1년은 좀 짧다. 한 5년 만에 아팠어야 하는 건데.

 저기요! 계산해 드릴게요! 격투기 선수가 목소리를 높인다. 화가 났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소리통이 큰 악기가 원래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저런 사람들은 살면서 자잘한 싸움에 휘말릴 일이 없다. 우습지만 그래서 성격이 좋다. 나도 살면서 덩치 덕을 많이 봤다. 그런데 요 며칠 아프면서 구부정하게 다니느라 덩치가 줄어들기라도 한 건지 마음 씀씀이도 쪼그라든 것 같다. 아까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나 자는 동안 먼저 식사를 한 와이프에게 괜히 심술을 부렸다. 따로 고기를 구워준다는 말에 입맛 없으니 관두라고 말했다. 입맛이 없단다. 곧 죽어도 밥은 챙겨 먹는 인간이 입맛이 없다니 와이프 얼굴에 걱정이 더께더께 들러붙었다. 그걸 보자 엄마가 달래주는 애처럼 마음이 누그러졌다. 먹어야 힘이 나지. 두 번째 권하는 말에 감사하단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습지만 왕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망한 왕국의 왕. 남은 건 자존심뿐이라 인정 많은 제 백성들 덕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주제에 팬티 차림으로 배를 내밀며 큰소리치는 왕.

 냉장고 문 좀 열어 주세요.

 그 안에 물 있어요.

 선풍기도 틀어 주시고. 남자가 말한다. 남자는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한다.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한 팔로 출동한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가 지시를 하고 긍정 또는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다. 남자의 침대는 병원에서 쓰는 걸 가져다 놓은 것 같다. 침대에 붙은 간이 식탁 위엔 빨대를 꽂은 소주병 하나가 놓였다. 남자가 누운 자세로 소주병을 집어 한 모금 쭉 빤다.

 크으.

 더 필요한 거 없으시죠? 내가 묻는다.

 아니, 잠시만.

 레인지에 밥 하나만 돌려줘요. 남자가 말한다.

 보호사 오시는 분이 안 계시나요.

 있긴 한데, 한참 기다려야 하니까.

 그럼 이거 밥만 해드리고 저흰 들어갈게요. 시내에 구급차가 없어요. 내가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넣으며 말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남자는 언제 꺼냈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떨어지지 않게 이빨로 단단히 고정한 뒤 불을 붙인다. 앙 다문 잇새로 담배 연기가 질질 샌다. 띠링. 밥이 다 데워졌다. 밥을 식탁에 놓는다. 밥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담배 연기가 뒤섞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난다. 이제 남자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려는데 발에 뭐가 퉁 하고 걸린다. 남자의 오줌을 담아놓은 플라스틱 통이 엎어지며 바닥을 오줌 바다로 만든다.

 그냥 둬요. 있다 치워주겠지.

 괜찮아. 괜찮아.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며 누워 있는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낄낄댄다. 웃음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약봉지를 까서 입에 털어 넣는다. 약국 구석의 정수기 노즐에 종이컵을 가져다 댄다. 냉수와 함께 약을 목 뒤로 넘긴다. 아픈 걸 너무 오래 참은 탓인지 금세 온몸에 약기운이 돌며 편안해진다. 기침이 멎고 불에 덴 것 같았던 가슴도 진정이 된다. 마약 중독자들이 이래서 약을 못 끊는구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출입문을 연다.

 안녕히 가세요. 약사가 인사한다. 이제 보니 덩치만 컸지 순한 사람이다. 몸이 살만해지니 세상도 살만해 보인다. 저렇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을 두고 격투기 선수를 상상했다니. 새삼 몸이 너무 아프면 성격도 이상해진다는 말을 실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픈 사람이 착한 내면을 갖기란 쉽지 않다. 아프면 나라도 팔아먹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아프질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이 먹을수록 아플 일이 많아서 걱정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까 걱정이다. 망한 왕국에 홀로 남은 왕처럼 나도 외롭게 시들어 버릴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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