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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r 03. 2024

엄마, 나 한 잔 하고 갈게요

겨울은 집착이 심한 연인 같았다. 3월이 왔는데 봄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줄 생각을 않았다. 눈이 내렸다. 눈이 오는 날은 보통 환자도 없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그래서 조금 안심했다. 상황실에서 지령이 내려왔다.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몸에 쏟았다는 신고였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엔 그게 멎을 때까지 내도록 술을 퍼먹는 사람들이 있다. 적당히 좀 마시지. 어떻게 커피를 쏟으면 119에 신고할 정도로 다칠 수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출동했다.


현장엔 경찰차가 있었다. 이상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경찰 둘이 카페 정면에서 만취한 남성 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분이 다치신 거예요? “ 내가 묻자, 자기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경찰에게 말했다.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말을 싸가지 없게 하니까. “ 억울하다는 듯 비린 웃음을 지었다. 경찰은 눈을 맞추진 않고 ”예, 예. “ 사무적으로 답하며 손바닥만 한 수첩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내의 내 담당 소화전 주변이라 오며 가며 들르던 곳이었다. 몇 번 인사를 해서 사장님과도 안면이 있었다. 사장님이 카운터 옆 테이블 근처에 걱정과 화가 절반씩 섞인 얼굴로 서 있었고, 테이블 의자엔 거기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바지의 왼쪽을 허벅지까지 걷어붙인 채 앉아 있었다.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에게 뜨거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던진 것이었다. 외상가방에서 꺼낸 거즈에 식염수를 부어 적신 뒤 물기를 짜냈다. 거즈를 한 장 한 장 펴서 시뻘게진 아르바이트생의 다리에 올려놓는 동안 경찰과 취객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 속을 살살 긁었다니까. 이게 한쪽 얘기만 들어선 몰라요.” 주워섬기는 취객에게 젖은 거즈를 집어던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청년은 구급차에 타기 전에 혹시 엄마에게 전화 한 통 해도 되냐고 물었다. 추우니까 차에 타서 하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집에 홀어머니와 자기 둘만 살아서 전화를 해드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청년은 이십 대 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칠순을 넘겼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엄마, 나 한 잔 하고 갈게요. 토요일 이잖아. 네, 네. 죄송해요. 먼저 주무세요.”  늦둥이 청년이 참 속이 깊다는 생각을 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병원 가는 동안 청년이 말했다.


“근데, 저 사람은 그냥 저렇게 풀려나나요?”


“아닐 거야. CCTV도 있고 하니까 경찰이 조사를 하겠지.”


“계속 욕을 했어요. 아르바이트생 주제에 싸가지가 없다고. 우리 엄마 몇 살이냐고도 묻데요.”


“별 인간들 많지?”


“네.”


“그러고 보니 나도 계속 반말이었네. 미안.”


“아녜요. 쪼가 다르잖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말하며 웃는 얼굴은 씩씩했지만 어딘지 씁쓸해 보였다. 이십 대 중반이 저런 얼굴을 할 수가 있나. 내가 저 나이땐 엄마 아부지 속 뒤집어 놓기 바빴는데. 생활비를 대느라 자정이 다 되도록 일하는 청년에게 자정까지 술을 퍼먹던 손님은 아르바이트생 주제 운운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컵을 집어던졌다.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을 발에 차이는 쓰레기 대하듯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런 게 가능한 세상이 된 걸까. 아니면 원래 인간이란 동물이 고차원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하물며 짐승도 제 동족을 종 부리듯 하지 않는데 인간은  하나 부끄럼 없이, 가슴을 펴고 저의 잔혹함을 자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규칙을 만들고, 경전을 만들고, 어쩌다 세상에 기적처럼 태어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서 두고두고 읽는 건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은 이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수준미달의 종인 것 같다. 그래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청년을 병원에 인계했다. 의사들이 파업 중이었지만 아직 병원을 지키는 의사들도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청년의 다리를, 마음을 뒤덮은 뜨거움이 차디 찬 눈으로 덮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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