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Aug 23. 2024

낭만과 고추장과 에딘버러

어떤 사람은 스물에도 현실이고, 어떤 사람은 칠순에도 낭만이다. 현실과 낭만은 갈래길이어서 어느 한쪽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다른 길로는 가기 어렵다. 아주 가끔 현실을 혹은 낭만을 살다 보면 반대편으로 뻗어있는 또 다른 갈래길을 만나기도 하는데, 인생에 몇 안 되는 기회지만 사람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원래 자기가 가던 길을 고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삶은 그렇게 극명하게 나뉜다. 현실과 낭만으로.


에딘버러에서 엽서가 왔다. 엄마가 보낸 거였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자리한 나라, 거기서도 인구 백만을 채 넘기지 못하는 소도시에서 에딘버러, 엽서 두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단연코 낭만이다. 칠순이 다 된 울엄마는 친구랑 손잡고 배낭여행을 떠났는데 원래대로라면 아들에게 보냈을 엽서의 수신인이 이젠 손녀들로 바뀌어 있었다. 엄마의 낭만을 전염(?)시키기엔 아들은 이미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았으므로, 대상을 손녀들로 바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먹을 뻔했다. 엄마는 비행기 삯이며 숙박비를 자기 돈으로 마련하지 않았다. 아들 덕도 아니다. 엄마의 친구의 지인이 그걸 전부 마련해 주었는데, 일일이 부연하기엔 사정이 너무 길고 그냥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도 낭만 덕이었다. 낭만이 엄마를 에딘버러로 보냈다.


돈이 모자라 스코틀랜드 한복판에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는 여행이지만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해리포터가 있기 때문이었다(J.K 롤링은 작업의 대부분은 이곳 카페 Elephant House에서 했다. 다이애건 앨리도 여기에 마련되어 있다). 엄마는 해리 포터를 읽지 않았지만 내가 한참 영문 소설을 읽기에 빠져 있을 때 그걸 부러운 눈으로 보곤 했기에, 말하자면 그건 엄마가 손에 쥘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낭만이었다. 짧은 엽서지만 에딘버러가, 해리포터가 주는 낭만 속에서 엄마는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낭만은 낯선 여정인 동시에 꿈에 그리던 고향이다. 2024년 에딘버러에서 고향을 찾은 엄마는 내년엔 또 어디에서 고향을 찾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