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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03. 2023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굳이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생각의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기억들이 있다. 일상의 고요한 물길 아래 미세한 뻘 모래처럼 침잠해 있던 그것들은 어쩌다 곁을 지나는 발길에 소용돌이치며 솟구쳐서 맑은 물을 탁하게 만든다.


 여름해가 절정이던 어느 날, 잘 아는 소방서 직원과 그 동료들이 함께 휴가를 떠났다. 강원도 산골의 한적한 민박이었다. 총각도 있었고, 겨우 안사람의 허락을 득해서 나온 유부남도 있었다. 젊은 남자들이 모여서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놀았다. 사무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출동벨 소리도, 그들을 애타게 부르는 요구조자의 외침도 없었다. 함께 길을 걷는 여인의 보드랍고 따스한 손길이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현관문 앞까지 마중 나오는 아이들의 들뜬 눈빛은 없었지만, 남자들은 그런 시간도 썩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계곡물에 뛰어든 햇살이 조약돌 틈새로 부서져 작은 물고기 떼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 눈을 감고 한가로이 흐르던 바람은 길을 막은 나무의 줄기 줄기를 넘나들며 간질이고, 나무가 오소소 떨며 해처럼 빛나는 잎새들을 어지럽게 흔들어 댔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문득 멈추어 가슴 깊이 산 공기를 들이마셨다. 밤늦도록 이야기가 피어났다.


 이튿날 아침, 황토방에 불을 때고 잠이 들었던 직원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심정지였다. 일산화탄소와 결합한 헤모글로빈이 시신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붉은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익히 아는, 수 백 번을 본 죽음의 민낯을 애써 외면하며 영원히 잠든 동료들의 가슴을 쉼 없이 내리눌렀다. 황토방의 열기가 시신에 옮겨가서 마치 그것이 원래의 체온인 양 절망하는 사람들을 기만했다. 주변 관서에서 수 대의 구급차가 출동했다. 구급대원들이 떼어내기 전까지 살아남은 직원들은 악착같이 소생술을 지속했다. 두 손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안타깝긴 한데, 사실 창피한 일이죠."


 당시에 근무하던 관서의 센터장이 툭 뱉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불을 때기 전에 점검을 했어야지요. 안전을 책임지는 게 우리 일인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는 오래도록 사무직에 있어서 현장 경험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저리 말을 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맥 없는 혈관을 짚었을 때의 까마득함과 체온계가 인지하지 못하는 죽음의 온도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조미료가 덜 들어가서 짜장면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평가하듯 말하는구나.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태도가 저 치의 가슴엔 자리잡지 못했구나.


 죽음을 대면하여 공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어느 신에게나 조용히 기도를 올릴 수도 있다. 그게 어렵다면 죽음 자체를 외면하는 방법도 있다. 마음의 집이 얼마나 단단하게 지어졌느냐에 따라 개인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죽음을 떠올리는 개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인간의 죽음을 조롱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소방관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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