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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10. 2023

구급차를 이겨라


 50대 중반쯤으로 뵈는 아주머니였다. 두 어시간 전부터 배가 아팠다고 말하며 구급차에 올랐다. 멀쩡히 걸을 정도면 응급상황은 아닐 텐데, 조금 고까운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택시비가 아까워서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급한 환자를 이송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건도 그러하리라 단정지은 게 실수였다. 아주머니는 구급차 들것에 눕기가 무섭게 의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적사항을 묻는 말에 두서없는 단어를 몇 마디 내뱉더니 곯아떨어지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먹을 세워 복장뼈 위를 세게 눌렀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정말이지 드라마 같은 멘탈 체인지(Mental Change: 일반적으로 의식 저하를 지칭함)였다.


 "멘탈 체인지야, 본부에 무전하고 최대한 빨리 가자!"


 "멘탈 체인지요? 갑자기?"


 "일단 출발!"


 주말 저녁이라 대로변에 불법으로 주정차해놓은 차량들이 많았다. 도시구급대에 수년간 근무하면서 잔뼈가 굵은 운전원이 멈춰 선 차들과 달리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달렸다. 도저히 빠져나갈 공간이 생기지 않는 구간에서는 소위 '모세의 기적'이란 것도 일어났다. 이차선의 양 옆으로 차들이 일사불란하게 갈라졌다. 수십 구의 후미등 사이로 뻗은 길이 마치 비행기 활주로 같았다. 다급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며 사거리를 지나려는 찰나, 일이 터졌다.


 도로교통법상 구급차도 사거리의 신호를 어길 수 없지만 응급환자를 이송할 경우엔 예외를 적용한다. 모터사이렌을 켜고 여전히 붉은 신호가 켜진 방향으로 서서히 진행하는데, 좌측에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따라붙었다. 그것은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하고 약 5초간 분노의 크랙션을 울린 뒤, 구급차가 멈칫하는 틈을 타서 앞쪽으로 빠져나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갑작스러운 구급차의 출현에 운전자가 놀라는 경우도 있으니까. 욕을 먹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처치실 옆 창문으로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체징후가 점차 불안정해지고 있어서 인계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구급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아예 멈추어 서버렸다.


 "뭐야? 왜? 왜 멈춰?"


 "형! 앞에!"


 "앞에?"


 순간 운전석 쪽으로 뚫린 창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마주친 검은색 세단이 하나뿐인 병원 입구를 가로로 틀어막고 있었다. 야간이라 입구에서 근무하는 병원 관계자도 없어서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구급차에서 서둘러 내렸다. 제복을 입은 채로 평생 욕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 날은 기필코 할 작정이었다. 그 마음을 읽은 건지 검은색 세단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내 몸을 스치듯 지나 구급차 뒤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뒷 창문이 열리며 가운데 손가락이 잘 보이도록 번쩍 치켜든 팔 하나가 나타났다.


 분을 삭일 여유도 없이 환자를 인계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자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 앞에서 쓸데없는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를 괴롭게 만든 건 어쩌면 아까의 검정 세단이 이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남이야 어찌 되던 내 인생의 승리가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으로 타인을 밑거름 삼아 강자로 거듭나야 한다는 정신. 어쩌면 오늘날 수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있을지 모를 그 정신 말이다.


 두 딸을 앞에 두고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칠 때, 요즘은 이게 맞나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의심이 들어선 안될 일인데, 어느 날 우악스러운 세상이 내 새끼들을 맘 놓고 두들겨 팰 것 같아 너희도 주먹을 내지르라 가르쳐야 할 것만 같다. 너희도 따라서 악인이 돼라 말해야 할 것 같다. 곱씹을수록, 아이들이 떠안고 살기엔 너무 슬픈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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