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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13. 2023

안녕하세요. 14급 공무원입니다.

 해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기관에서는 관할 내 소방관서와 합동훈련을 실시한다. 그날은 어느 초등학교와 훈련이 예정되어 있어 학교 밖 담장 옆에 구급차를 세우고 대기 중이었다. 새털 같은 구름들이 점점이 떠다녔고, 봄볕이 느슨한 바람을 타고 어깨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잠이 살살 왔다. 옆에는 이제 막 소방사 시보 딱지를 뗀 후임이 앉아 있었다. 짬 차이가 나는 형이 옆에 있어서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OO아, 너 결혼정보회사 등급표 본 적 있니?"


"네? 그게 뭔가요."


"직업별로 회원등급을 나눠 놓은 표야. 서울대 법대 출신 판사가 1급이고, 법조계 종사자나 고위직 관료들이 2,3급. 의사도 등급이 있는데 A급은 돼야 겨우 4급으로 분류돼. 내 친구 응급실 의산데 걔는 6급이야."


"엄청 빡세네요."


"그럼 우린 몇 급이게?"


"글쎄요. 한 9급쯤 안 될까요? 제가 9급 공무원이니까."


"9급?" 문제의 등급표를 인터넷으로 찾아내서 답했다. "여기 보면 명문대 출신에 20대 대기업 입사자가 9급이네. 우리 형편이 걔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으나 후임은 다소 기가 죽은 눈치였다. 자조 섞인 농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소방서 짬밥이 적어도 3년은 되어야 한다는 걸 이 때는 몰랐다. 그 정도가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자각하는데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어진 후임을 보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겠니, 여기저기서 띄워줘서 네가 몰랐던 모양인데, 우리 3D 중에서도 상 3D 업종이야.


"OO구급, 출발하세요." 차량국에서 무전이 들렸다. 후임이 오른손을 들어 경광등, 사이렌이라 적힌 특장 버튼을 누르고 학교 안으로 차를 몰았다. 건물 정면에는 벌써 펌프차가 주차를 하고 경방 대원들이 호스를 끌어다 1층 유리문 안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창문에서 훈련용 연막이 피어오르고 함성인지 탄성인지 모를 앳된 외침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엄마!" "하느님, 부처님, 유느님!" 건물에서 입과 코를 막고 허리를 숙인 채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눈가에서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우리의 임무는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쓰러진 환자를 들것을 이용해 건물 밖으로 대피시키는 일이었다. 지정된 교실에 들어가자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뵈는 남자아이 하나가 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환자 분! 환자 분!"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실로 대단한 연기였다. 조심스레 환자를 로그롤(log roll: 통나무 굴리기 법. 허리 부상이 있거나 의식 없는 환자를 옆으로 기울여 들것으로 이동하는 방법)하여 들것에 옮겼다. 장정 둘이 들기엔 너무 가벼워서 들것이 번쩍 하고 들렸다. 아이가 "흡!" 놀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작은 눈이 다시 질끈 감겼다. 아이의 입가가 씰룩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환자를 밖으로 대피시키자 곧 훈련의 피날레가 시작되었다. 펌프차 상단에 설치된 고압 방수포가 수십 미터 상공까지 길고 하얀 물줄기를 뿜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물줄기가 떨어지는 운동장 중앙을 향해 꺅꺅 소리치며 내달렸다. 여기저기서 선생님들의 새된 호통이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파스텔 톤의 봄 하늘 아래 투명한 물방울들이 아이들 머리 위로 별처럼 내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후임은 진즉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등급표에서 우리가 몇 급에 해당하는지 말을 해주진 않았다. 존경하는 한국사 선생님께서 공부 안 하는 학생들에게 "14급, 15급 공무원 하면 딱 맞을 새끼들!"이라고 소리치시던 게 생각나서 혼자 낄낄거렸다. 그래, 나는 14급 공무원하면 딱 맞다. 아니라면 이렇게 신나는 경험을 평생 못 해볼 테니까. 내가 1급을 못 하는 게 아니고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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