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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Nov 23. 2023

이 죽일 놈의 김장

 요번 김장은 딱 50 포기만 할 거라고 엄마가 얘길 해서 긴장을 놓았다. 예년에는 7,80 포기를 했고 무리를 할 때는 100 포기를 했다. 작년 김장은 예산을 좀 줄여보려고 아버지가 텃밭에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배추 안쪽이 다 녹아서 그걸 다 잘라내며 손질한다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깔끔하게 딱 50 포기만 한다고 하길래 아버지 어머니도 나일 먹긴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와이프한테 얘기하기도 좋았다. 요번엔 금방 끝나겠어. 내심 좋은지 와이프가 싱긋 웃었고 나도 웃었다. 시골집에 가서 방수포로 가려놓은 배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웃었다.


 뭔 놈의 배추가.


 살면서 그런 배추는 처음 봤다. 무슨 품종 개량이라도 한 것처럼 덩치가 큰 배추. 속이 있는 대로 들어차서 수박처럼 무거운 배추. 최홍만 씨가 키우기라도 한 건가. 소금물에 절이기 전에 반으로 갈라놓으니 그제야 어지간한 배추만 해졌다. 그런 게 50개가 쌓여 있었다. 아, 이건 그냥 100 포기 한다고 생각을 해야겠구나. 과장이 아니고 이전에 쓰던 대형 고무다라이 2개가 모자라서 이틀에 걸쳐 배추를 절였다. 엄마가 딱 50 포기만 할 거라고 이야기한 저의가 궁금했다. 분명 배추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배추를 절인 이튿날엔 온 가족이 둘러앉아 김치 속을 넣었다. 엄마가 어디 김치공장에서 배워 온 노하우라며(그건 또 어떻게 배웠는지) 속이 깊은 커다란 양재기에 넘칠 듯 만들어 둔 속을 붓고 절인 배추를 푹 담갔다 꺼내는 식으로 김치 속을 넣었다. 배춧잎을 한 장 한 장 까뒤집어 새가 빠지게 속을 채우는 방식보다 훨씬 수월했다. 작업 속도가 2배 이상 빨랐던 것 같다. 엄마가 50 포기만 할 거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외할머니가 죽지 않으면 다음에 또 올게, 그랬었는데.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엄마는 그 말을 했던 해의 김장을 마지막으로 자기의 길고 길었던 김장 역사를 마무리했다. 엄마가 웃으면서 말을 하는 걸 보니 이제 상처가 많이 아문 것 같았다. 예전처럼 김치 속에 들어가는 청양 고춧가루가 너무 맵다고 눈물을 찔끔거리지 않았다.


 자동차 트렁크에 꽉꽉 눌러 담은 김치통을 싣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해줘야지 뭐.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 아부지 늙으면 너거들은 기냥 김치 사 먹고살아라 하는 얘길 하셨던 것 같은데 일 년 새에 마음이 또 변한 모양이었다. 안 그랬으면 좋겠구만 엄마도 외할머니가 나이 먹으면서 점점 그렇게 변했던 것처럼 고집불통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돈 몇 푼이면 마트에서 포장 김치를 살 수 있는 편안한 세상이 되었는데도 꾸역꾸역 자기 손으로 담근 김치를 자식들 입에 넣어주려는 고집불통. 이 죽일 놈의 김장을 내 세대엔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점점 김치배가 커지는 두 딸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영 글렀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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