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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20. 2023

슬픈 화분 테스트

 킴은 모 대학 응급구조학과에서 온 소방서 실습생이었다(김은 먹는 김과 헷갈리니 킴으로 적는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살짝 긴 단발에 흰자위가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말려 올라간 입엔 선홍색 립을 칠했는데, 피부톤이 워낙 하얘서 촌스럽지 않고 잘 어울렸다. 어린 시절부터 수영을 했단다. 그래서인지 펑퍼짐한 실습생 유니폼을 입어도 태가 났다. 아침에 출입문을 힘차게 열고 등장하는 킴의 존재는 신선했다. 어딘지 신나는 톤으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 뒤엔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눈을 마주쳤다. 남초 조직의 경직된 분위기를 깨는, 조금 지난 표현을 쓰자면 그야말로 비타민 같은 아이였다. 직원들이 오히려 쑥스러워서 데면데면했다.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MZ세대'인가 머시긴가 저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이제 나도 슬슬 라떼 사람이라 새로 사귄 사람이라면 격식과 예의를 적당히 갖추고 대해야 한다는 주의인데, 킴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소방서 실습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심어주고,  잘 배우고 한편으로는 충분히 즐기고 싶어 했다. MZ가 구세대의 머릿속엔 '문제(MunZae)'가 있는 세대로 인식되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지 않나 싶었다. 옛사람들이 구호로만 외치는 출근하고 싶은 직장, 즐거운 직장의 청사진을 어쩌면 킴 같은 젊은 세대가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장님, 반장님 MBTI는 뭐예요?" 난데없는 물음에 나는 종종 뇌의 연산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MBTI가 뭐니."하고 답하자 개구쟁이 같은 입이 슬쩍 벌어지며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장 20여 분에 걸쳐 요즘 사람들의 성정을 16가지로 구분하는, 킴의 말을 빌리면 체계적이고도 합리적인 현대 정신과학의 소산에 대하여 골치 아픈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MBTI라는 것이 우리 세대의 성격 구분 4종, 즉, 소심이와 성격파탄자와 또라이와 자유주의자(A,B,AB,O)의 몇 단계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킴은 마치 심리상담사라도 된 것처럼 나의 MBTI를 구분하는 테스트를 몇 가지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슬픈 화분' 테스트다.


"내가 지금 너어어무 슬퍼서 화분을 하나 샀어." 킴이 말하자,


"화분을 왜 샀니."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킴은 알만하다는 듯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 내 눈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장님은 전형적인 T입니다."


"그게 뭔데?"


"여태 설명드렸잖아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요."


"내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걸."


"지금 말씀하시는 것도 전형적인 T처럼 하세요."


 말은 웃으면서 했지만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한 때 문학도를 꿈꿀 만큼 나름 감수성도 풍부하고 타인의 감정에 잘 동화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테스트는 정반대의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공감을 못한다니, 그래서 첫째 딸이 뭔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나한테 털어놓질 않았나. '어차피 아빠는 다 괜찮아, 그렇게만 말하잖아!'하고  소리쳤던 게, 그런 의미였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내가 소방서에 들어오기 전에도 전형적인 T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리를 하려는 성향은 T에 가까우니, 또 한차례 씁쓸함을 맛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걸 경험했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노인에게 산소를 주어도 죽음의 그림자가 실시간으로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요양병원 병실 문을 열 때마다 훅 끼치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냄새는 이제 너무 익숙하고, 산마루를 질주하던 20대 청년들이 사발이와 거목 사이에 끼어서 죽는 걸 몇 번은 봤고, 기계에 저며진 일용직 노동자들의 오른팔에서 죽음만큼 고통스러울 미래를 보고, 등등, 등등. 잠시 잠깐 눈만 감아도 이 모양인데, 만약 그들의 아픔에 일일이 공감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있는 대로 황폐해졌겠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하는 죽음은 판타지지만, 나에게 있어 죽음은 눈앞의 현실이고, 곁에서 숨을 쉬는 생생한 무엇이었다. 거기에 감상이나 공감이 끼어들었다면 아마도 많은 동료들이 그렇듯 맨 정신으로 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내가 비록 T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나아가 전형적인 모습으로 굳어진 건 소방서에서 일한 탓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킴은 졸업하고 병원 경력을 쌓은 뒤 다시 소방서로 돌아오겠노라 약속하며 떠났다. 그녀가 알려준 16가지 성격 유형은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힌 지 오래다. 대신 또 다른 MZ 신입이 MBTI를 물어올 것을 대비해 답변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


"저의 MBTI는 PTSD입니다."


어쨌든 영문 4자이니 시적 허용으로 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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