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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24. 2023

먼 길을 돌아갔다

  아이 손을 잡지 않고 2킬로쯤 걸었다.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지고, 눈이 녹아 맨 땅이 드러났다가 그늘져 얼음이 깔리는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올해로 6살인 둘째는 아빠 손을 잡지 않고 그렇게 오래 걸어본 일이 처음이었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는 동안 일부러 입을 떼지 않아서 시간이 더디게 갔다. 풀이 죽은 모습이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를 들기엔 너무 어리고(들 자신도 없고), 확실히 잘못을 인지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내가 아이를 크게 혼내는 경우는 대개 물리적인 위험이 확실시될 때에 한해서다. 냄비가 펄펄 끓고 프라이팬이 사방으로 기름을 튀길 때 주방 근처에서 장난을 치거나 뛰어다니던가 하면 타이르듯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창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걸 끌어 내려서 울 때까지 혼을 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섬유질이 많은 음식(견과류, 귤, 사과 등)이라도 입에 집어넣으려 하면 나도 모르게 호통이 나온다. 그럴 때면 간식을 준비한 아내에게까지 성을 내는데, 그러다 몇 번을 다투었다. 아내는 내게 유난이라 했고, 나는 재수 없어서 한 번이라도 잘못되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받아쳤다. 남들이 보기엔 직업병인데, 그게 내 기준에선 정상이었다.


 둘째가 호주머니에서 플라스틱 장난감 별 몇 개를 꺼냈다. 빨강, 노랑, 보라, 색색으로 빛나는, 어른이 보기엔 장난 같지만 아이의 눈엔 제 눈이 빛나는 만큼 빛이 났을 그것. 동네 서점에 있는 잡화 코너에서 집어온 것 같았다. 내가 몰랐으니 계산을 했을 리는 없고, 아빠 성격에 크게 쓸모없다면 굳이 사주지 않을 테니 말없이 집어왔지 싶었다. 쭈뼛대면서 손바닥에 올려놓았지만, 마치 ‘이 정도면 괜찮지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거 가져오면서 사장님한테 돈을 드렸니? 아이를 앞에 두고 물었다.

 ...... 아니요.

 남의 물건을 말없이 집어 오면 안 돼. 부러 감정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라 눈치는 빨라서 제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속도가 빨랐다.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서 계산하고 오자. 여보, 이거 얼마짜리였지? 

 다른 일로 혼낼 때는 종종 고개를 젓는 아내지만 오늘은 나와 의견이 같은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천 원이에요.


 손을 잡지 않고 걸으니 신경이 몇 배는 더 쓰였다. 멀찍이 지나는 차와 오토바이 소리에 수시로 눈이 갔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어쩔 수 없이 한 차례 말을 했다. 고개 들고 똑바로 걸어. 절반쯤 걷자 아이는 발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눈이 녹다 말아서 진창인 길을 위태롭게 걸었다. 가슴께에 정을 때려 박는 기분이 들었다. 사십 여 분 만에,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서점이 나타났다. 나는 입구에 서서 아이에게 말했다. 죄송하다 하고, 주머니에 있는 천 원 사장님한테 드리고 와. 아이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서 몇 분을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못하겠어요.  왜? 부끄러워서요. 충분히 반성했다 싶어 함께 가서 용기를 조금 실어 줬다. 괜찮으니까, 말씀드려. 아이는 집에서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겨우 한 마디 했다. 죄송합니다.


 먼 길을 오게 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랬다. 편의점에 들러서 막대 사탕을 하나 샀다. 평소라면 신이 나서 떠들며 걸었을 텐데 말이 없었다. 또 그럴 거야?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잃어버리면 안 돼. 아주 중요한 거야. 아이나 나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나자 한 결 걸음이 가벼워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손을 꼭 쥐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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