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Riders in Danang
아버지가 두 해 동안 모은 쌈짓돈으로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임도관리원 월급의 절반을 매달 통장에 꽂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식 때문이 아니고 손주들 때문에 가는 거라고 열 번도 넘게 입을 떼셨다. 그러려니 했다. 내 새끼들이 그 사랑의 기억을 유년의 간이역에 내려놓고 까마득히 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걸 깨달았다. 문득 인정머리 없는 내가 느껴져서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돌았다.
아침 7시에 인천에서 뜨는 비행기를 예약하는 바람에 새벽 두 시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공항에 도착한 이후에도 아이들이 인파에 휩쓸릴까 싶어 긴장의 끊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딴청을 부리는 걸 데려다가 혼을 냈다. 엄마가 얼굴 구기지 말고 다정하게 말하라 타박을 줬지만 이후에도 몇 번인가 더 혼을 냈다. 말이 통하는 곳에서는 그나마 안심인데, 밖에 나가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부모들이 공항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이들 뿐 아니라 아내도 비행기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속초로 다녀왔다. 결혼식 당일에 첫째는 벌써 세 달째 엄마 뱃속을 점령 중이었다. 입덧이 심해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지 않았던 닭강정만이 신혼여행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열 바퀴 돌았는데 아직 출발을 안 해.” 슬슬 지겨워졌는지 첫째가 입을 떼었다. 우리가 몸을 실은 비행기는 벌써 삼십 분이 넘도록 활주로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앞선 비행기들의 출발이 늦어져서 이륙이 늦어지던 참이었다. “스무 바퀴.” 세는 것도 질린 듯 노곤한 몸을 뒤로 누이며 말했다. 그리고 몇 바퀴쯤 더 돌았을까, 엔진이 굉음을 내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위아래 입술을 입 안으로 들이밀며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는 옆에서 평온한 듯 보였지만 비행기가 온전히 이륙할 때까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촌스럽긴.” 말하는 나도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다낭공항의 입국 심사는 느리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절차 중 절반 정도는 자동으로 전환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여기는 모든 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내 여권을 받아 든 직원은 기어코 도장을 제 발아래 한 차례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다시 주워서 여권에 찍었다.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느끼게 된 사실은 그 모습이야말로 베트남 다낭의 전형적인 템포고 리듬이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공항문을 박차고 나와 축축하고 미지근한 바다 공기를 허파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제야 멀리 떠나왔다는 실감이 났다.
웹사이트를 통해 미리 예약해 둔 픽업 버스에 올랐다. 공항을 벗어나 다낭 시내로 이어진 도로에 이르렀다. 버스가 신호를 받아 교차로에서 대기할 때마다 사방에서 바이크가 튀어나와 N열 횡대로 자동차 앞에 줄지어 섰다. 한 사람만 태운 바이크는 드물었다. 대부분 둘, 많게는 네 사람이었다. 스쿠터 발판은 거의 서서 타는 아이들 몫이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봤다면 정신머리 없는 부모라고 분명 한 마디 했지 싶었다. 버스 기사가 “헤이, 헤이. “ 하며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여행하는 동안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내가 내내 조수석에 앉았다). 젊은 여자가 달라붙는 청바지 소재 반바지에 빨간 힐을 신고 바이크 뒤에 앉아 있었다. 좌석에 눌린 엉덩이가 부풀어서 남자라면 누구나 심장에 긴장감이 생길 법한 풍경이었다. 버스 기사와 눈을 마주치고 멋쩍게 한 번 웃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아내는 창 밖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취미 아니면 직업으로 인해 선택하는 교통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것이 이곳에선 일상이었다. 바이크의 수가 자동차의 몇 배는 되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거나 핸드폰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갔다. 젊은 사람들은 바이크와 바이크의 간격을 겨우 십 여 센티만 두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면서 갔다. 체감 평균 시속 40에서 50킬로로 느리게 달렸는데, 더운 나라 특유의 느긋함과 베트남 공안의 단속이 어우러져 빚어지는 현상인 듯했다. 밥벌이하느라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사람도, 뽐내듯 머플러를 까뒤집고 굉음을 내며 달리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에서 넷(어쩌면 그 이상)을 실은 바이크가 나뭇잎이 날리듯 어지럽게 도로 위를 드나들었다. 익숙해지니 위험해 보인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평화롭기까지 했다.
엄마, 아버지, 우리 네 식구, 고모와 사촌 여동생까지 여덟 사람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리조트는 방이 세 개에 욕실 셋, 널찍한 거실과 야외에는 수영장과 테라스까지 딸려 있었다. 엄마와 아내는 평생 이런 곳에서 자 본 일이 없노라고 신이 나서 말했고, 나와 아버지는 덤덤한 척 어색하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여행을 자주 다녀 본 고모네 식구들만 자연스레 짐을 풀고 TV 전원을 켜서 한국 채널을 찾았다. 아이들은 벌써 수영장에 반쯤은 발을 담갔다. “옷 다 젖겠네. 추워서 안 돼.” 이상 기온 탓인지 1월에도 30도를 웃도는 베트남 날씨가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겨우 20도 언저리에 머물렀다. 아쉬운 눈으로 발을 빼는 아이들에게 이튿날 워터파크에 데려가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룸 서비스로 이것저것을 시켰다. 비릿한 젓갈 내음, 라임, 고수의 시큼하면서도 아찔한 향이 진동하는 음식이 도착했다. 아내와 첫째는 질색을 했고, 나와 둘째는 바쁘게 수저를 놀렸다.
저녁엔 다낭 시내의 한국 마트에 들르기로 했다. 베트남 물은 미끈거리고 목 넘김이 끈적하다고 툴툴대는 아내와 냄새에 민감한 고모를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예민함을 비난하며 택시를 잡았지만 마트에서 파는 두리안 맛을 본 뒤엔 조금 이해가 되었다. 좋은 말로 묘사가 어려운 맛이었다.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파인애플이 떠올랐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밤거리는 바이크가 수놓는 붉은 불빛이 지천이었다. 불빛들은 일렬로 쭈욱 뻗다가 교차로에 이르러 불꽃놀이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몇 안 되는 차들과 엉겨 붙어 로터리를 휘돌아 나갔고, 저들끼리 스며들었다 튕겨 나오는 일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화나서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다. 중간중간 자동차의 클락션만 말을 걸듯 뛰뛰뛰뛰 바이크 틈으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