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 일기

3. Ok? Ok.

by 백경

짙은 갈색 피부, 꼬질한 체크무늬 남방에 빨간 야구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호텔 앞에 서 있었다. 사촌 여동생의 이름이 적힌 작은 배너를 양손에 들고. 글자를 적었다기보다는 거의 그린 모양새였다. ”신 짜오. ” “신 짜오. ” 밝게 인사를 나눴다. 남자나 우리 가족이나 일단 무탈히 서로를 만난 데에서 오는 안도감이 그 한 마디에 녹아 있었다. 3,4일 차엔 미니 버스를 전세 내서 다니기로 했다.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이용료는 40불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나머지 가족은 뒷좌석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시보드에 놓인 성모상이 눈에 띄었다. 다낭에 와서 생소했던 일 중 하나가 잡아 타는 택시나 버스마다 불상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을 태우고 다닌다는 점이었는데, 성모상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었다. “바나힐? “ 남자가 물었다. 성모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기도를 남의 땅에 던져진 뒤에야 급하게 중얼거렸다. 신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바나힐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당시에 지어진 테마파크로 유명하단다. 현대에 이르러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카가 더해졌다. 프랑스의 명소들을 테마파크 곳곳에 미니어처로 만들어 둔 덕에 바나힐은 마치 역사가 오랜 유럽의 소도시를 연상케 했다. 카메라를 아무 방향으로 들이밀어도 작품이 될 만큼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나라를 집어삼킨 사람들 때문에 해발 1487미터 산꼭대기에 놀이동산을 지어야 했던 심정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신식으로 지어진 3층 규모의 실내 놀이시설도 있었다. 키가 작은 둘째는 이용할 수 있는 기구가 거의 없었다. 대신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움직이는 좌석에 앉아 공룡시대를 탐험하는 가상현실 놀이기구에 올랐는데, 영상이 시작할 때 터진 울음이 끝나도록 그칠 줄 몰랐다. 근처 경품 뽑기에서 10만 동(우리 돈 오천 원)에 농구공 세 개 가운데 하나를 골대에 집어넣었고, 거대한 토끼 인형을 상품으로 받아온 덕에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아내는 쓰잘 데 없는 짐이 하나 늘었다며 구시렁대었다.

점심식사로 비싸고 맛없는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베트남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이틀을 굶다시피 한 첫째만 게걸스럽게 접시를 파고들었다. 가파른 케이블카를 타고 바나힐 정상에서 다시 출발지점으로 이동했다. 버스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Ok? " 물어오길래 ”Ok. " 하고 대답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버스 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바나힐을 떠나 두 번째 일정인 호이안 구시가지로 이동하는 동안 농라(삿갓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쓰고 논밭에서 김을 매는 사람들을 보았다. 직접 쟁기로 땅을 뒤집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의 느린 볕을 맞으며 도로 한 곁에 몸을 누이고 잠든 개들도 여럿 있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와 바이크들은 잠든 개들을 멀찍이 돌아가거나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속력을 냈다. 개들도 그걸 아는지 잠든 자리에서 꿈쩍을 않았다. 지루하면서도 눈에 익질 않아 싱그러운 풍경 속으로, 아주 천천히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태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한 노랑으로 빛났다. 입 안 가득 볕을 머금은 남쪽 나라의 커다란 잎새들이 기분 좋게 몸을 흔들었다.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내를 거미줄처럼 가로지르는 좁은 도로를 따라 작고 오밀조밀한 노란색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제 때 페인트 칠을 하지 못한 외벽에는 군데군데 잔금이 생겼다. 그 틈으로 짤막한 잡초와 물때가 불길처럼 번져 있었다. 거리마다 고무줄 동력으로 나는 장난감 새를 5만 동에 팔았고, “No, No. “ 손사래를 치면 3만 동에 주겠노라 둘째의 손에 쥐어주면서 까지 공세를 이어갔다. 결국 목소리를 높여 장사하는 이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 치들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내 아이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농라에 승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인력거를 끄는 무리가 잊을 만하면 뒤쪽에서 나타나 좁은 길을 내달렸다. 입으로 ”뛰뛰빵빵. “ 장난처럼 소리 냈지만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인력거에 실린 몇몇 사람들의 우쭐한 표정과 대조되어 마음이 불편했다.

아버지는 호이안에 발을 들이는 시점부터 첫째 손녀의 손을 잡고 멀찍이 앞서 가셨다. 낯선 땅에서 가장 염려가 되는 존재를 우선 챙기는 게 빤히 보였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세월이 갈수록 굽어가는 아버지의 등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소원하던 손녀들과의 해외여행이 현실로 이루어진 올해 겨울, 아버지의 등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한껏 부풀어 있었다. 노을을 받아 빛나는 옛 도시의 오래된 길 위로, 작은 그림자와 큰 그림자가 춤을 추듯 지났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작은 그림자에겐 유년의 따스함이, 큰 그림자에겐 젊은 시절의 활력이 남아있길 조용히 기도했다. 그래서 언젠가 또다시 손을 잡고 걸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다른 식구들을 리조트에 내려주고, 아버지와 단 둘만 한국인 마트에 들렀다. 나는 하노이 보드카를, 아버지는 소주를 집었다. 아이들이 먹을 애플 망고와 과자도 몇 개 골랐다. 아내는 미끈하고 끈적이는 베트남 물맛에 익숙해졌는지 더는 생수를 사다 달라하지 않았다. 마트 주차장에 내려와 버스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번 ”Ok? " 물어왔고, “Ok." 하고 대답했다. 금세 나타난 버스기사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이동거리가 길어서 이미 10달러의 추가금이 생겼지만 아버지는 팁으로 10달러를 더 드리라고 말했다.


”텐 달러 티엔 팁(10달러는 팁입니다). ” 다해서 60불을 남자의 손에 건네었다. 남자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순식간에 걷혔다. 그는 정말 신이 나서 웃었다. 겨우 몇 푼으로 공치사를 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나도 웃었다. 대시보드의 성모마리아도 웃고 있었다. 정말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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