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베트남의 맛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조식 메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베트남식 밀크커피였다. 각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에 진하게 내린 커피, 시럽, 연유를 듬뿍 넣어 마신다.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향긋하고 씁쓸한 맛이 먼저 혀와 코를 감싸고 뒤이어 강렬한 단맛이 목구멍을 간질인다. 개운하면서도 부드러운 뒷맛이야말로 이 커피의 백미다. 한국식 믹스커피와 달리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다.
여행의 마지막이 아쉬워 연거푸 커피 두 잔을 들이켠 뒤, 쌀국수 코너로 가서 생소한 오리고기 국수에 도전했다. 국물을 한 입 뜨자마자 조류의 강렬한 누린내가 훅 끼쳤다. 초절임을 한 죽순이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고, 면발은 덜 익은 당면 식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아직 내가 사랑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맛이었다.
마무리 일정으로 다낭 외곽 소재의 온천파크를 방문했다. 천연 온천수가 솟아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산 하나를 통째로 온천 휴양지로 개발했다. 온천 발원지 아래로 흐르는 계곡 중간중간 널찍한 저수지를 조성해서 어느 곳에서나 따뜻한 물이 흘렀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와 둘째에게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용료는 약 50만 동(우리 돈으로 2만 5천 원 정도)이었다. 휴양시설에 현지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젠 당연하게 느껴졌다.
유황에 구운 반숙란을 숟갈로 떠먹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이후엔 노곤한 몸으로 머드 온천을 즐겼다. 하마가 진흙에 몸을 굴리는 까닭을 베트남에 와서 비로소 깨달았다.
분에 넘치긴 했으나 호사는 호사였다. 한겨울에, 따뜻한 남쪽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것도 수영복 차림으로 산중에서 온천을 즐기는 일이 내 평생 몇 번이나 더 있을까. 둘째는 며칠 전부터 베트남에 살고 싶다고 주문처럼 말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자주 놀러 올 텐데 공무원 월급 만으로는 버거울 것 같아 걱정이다. 틈틈이 끄적이는 글줄이 언젠가 살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속물 같은 상상을 해 본다. 어차피 이번 생에 군자로 살긴 글렀다.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로컬 맛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쌀국수 가게를 찾았다. 소고기 쌀국수와 닭고기 쌀국수, 닭 육수를 부어 먹는 베트남식 찰밥과 짜조를 주문했다. 베트남 음식을 끔찍해하던 첫째가 고수와 닭고기가 고명으로 올라간 찰밥을 그릇까지 핥아먹었다. 둘째는 짜조가 잠기도록 피시소스(생선젓갈소스)를 찍어서 입안에 넣기 무섭게 양손에 들고 먹었고, 베트남의 물맛을 평가절하하며 다낭시 수도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아내도 닭고기 육수를 그릇째 위장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그나마 얌전히 밥을 먹었다. 김치말이 국수에 열무를 얹듯 쌀국수에 고수를 올려 먹긴 했지만.
느려터진 출국절차가 어째선지 견딜만했다. 장장 네 시간을 공항에서 대기한 것치곤 컨디션이 좋았다. 아내도 힘이 남아도는지 출발 전까지 공항 주변을 산책하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한 잔 시켰다. 두리안 맛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 볼까 고민하다 관두었다.
귀국하는 비행기가 출발부터 도착까지 난기류를 타고 나는 바람에 한 숨도 잠을 못 잤다. 공항에서 까불지 말고 잠시라도 눈을 붙였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급이었다. 인천 공항 장기주차장에서 나흘간 꽁꽁 얼어붙어있던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 어떤 이질감 때문에 섣불리 액셀에 발을 올리지 못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무섭도록 빨랐다. 자비도 배려도 없이 지옥에서 온 개들처럼 달렸다. 총알 같은 저것들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나와 내 가족은 소리도 못 지르고 비명횡사할 것이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노곤했던 눈이 부릅 떠졌다. 밤새 쌓인 육체의 피로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이상한 기색을 읽은 아내가 플라스틱 통을 열어 껌을 건넸다. 껌에서 레몬그라스와 두리안과 고수 향이 났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긴 꿈을 꾸었다. 정글 같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아득한 풍경을 둘러 둘러 걷는 꿈을. 오늘 나는 꿈길에서 돌아와 죽음과 친구 하는 나의 현실을 마주한다. 소방서로 출근한다. 양손 가득 베트남 커피를 챙겨서 지친 동료들에게 맛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