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후

by 백경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샤프, 연극이 끝난 후 中


혼자 지내는 80대 할머니였다. 오한 때문에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부하는 자녀들과 다른 도시에 살아서 보러 올 형편이 아니란다. 그러게 요양원으로 가자니까 말을 안 들으셔. 수화기 너머로 볼멘소리가 웅웅거렸다.


격리 병실 자리가 날 때까지 구급차 안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담요를 발끝부터 턱 바로 아래까지 덮었다. 들것 위에 얼굴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아서 겹겹이 새긴 주름과 희멀건 버짐 위에 핀 검버섯이 더 또렸했다. 나는 거울을 보듯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날 같은 자리에 있을 나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이 덧씌워진 얼굴이었다.


나는 무명작가의 대본처럼 나의 마지막을 그린다. 해가 잘 드는 방. 열린 창으로 평생을 이름 몰랐던 들꽃 향기가 자장가처럼 끼친다. 곁에는 너무 잘 먹고 잘 살게 되어서 나보다 오래 살 친구들이 세 명쯤 있다. 다행히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혼자 남는 걸 두려워해서 그녀보다는 기어코 더 살아낼 작정이었다. 허리디스크와도 마침내 작별이다. 평생 내 오른 다리를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지만 그래봤자 죽음 앞에선 애송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내려다보는 친구들에게 주워섬길 말을 찾다가 포기한다. 다 쓴 치약처럼 영혼을 그러모아서 A4용지 두 장에 이미 할 말을 다 적은 탓이다. 아이들은 비행기 타고 온다고 늦을 것 같다. 만나 봐야 잔소리나 할 테니 오히려 잘 됐지 싶다. 이제 곧 자식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흔한 노인으로 역할이 정신없이 뒤바뀐 나의 연극이 종막(終幕)을 맞는다. 어릴 적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말에 혹해서 처음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던 날이 생각난다. 한 번만 참으면 된다. 한 번만 따끔하면 된다. 그 순간을 의연하게 견디고 자랑스레 주사 맞은 팔을 내밀어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간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이스크림.


할머니가 몸을 잔뜩 웅크리며 잠꼬대를 했다. 아빠, 추워. 아빠, 아빠. 그 모습이 마치 그녀의 연극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득한 훗날, 주어진 삶을 다 살아낸 내 딸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손을 들어 할머니의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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