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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Feb 14. 2023

발가락과 수강신청

 떡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눌러쓴 모자, 광대 위로 솟은 여드름 자국, 아마도 대여섯 번은 더 입은 뒤에 빨래통에 넣을 구겨진 옷가지, 현관에 쌓인 다 먹은 치킨 상자들. 신고자는 십수 년 전 대학생일 때의 내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 사이가 옷장 모서리에 부딪히며 대나무 쪼개지듯 발등 쪽으로 2센티쯤 갈라졌다. 많이 아플 텐데 티를 내지 않았다. 태연한 척했지만 수축기 혈압이 150을 웃돌았으니, 분명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발가락 사이에 거즈를 얇게 접어 끼우고 붕대로 감았다. 다행히 출혈은 많지 않았다.

 

“저 병원 가야 하나요?”


“당연하지요. 꿰매야 해요.”


“큰일 났네...... 10시에 수강신청인데.”


 시계는 9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부축해주려 했지만 멀쩡한 발과 아픈 발 뒤꿈치로 성큼성큼 걸어서 들것에 올랐다. 어지간히 맘이 급한 모양이었다. 필요한 처치는 다 했기 때문에 구급차 안에서는 더 해 줄 일이 없었다. 구급차에 오르기 무섭게 남학생은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냈고, 수강신청 사이트에 접속했다. 병원 도착 시간은 9시 55분.


 대기환자가 없어서 바로 치료를 받으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호사가 남학생의 이름을 불렀고, 구급차에서 들것을 내려 환자 분류소로 들어갔다. “선생님. “ 남학생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네? “ ”저 수강신청 이거 6개월 동안 계획한 건데, 10시에 시작하거든요. ” 거의 울상이 되어 말하는 남학생이 안쓰러웠는지 간호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9시 59분. 남학생을 비롯하여 출동한 구급대원들, 분류소의 간호사까지 한 마음으로 10시 정각을 기다렸다. 5, 4, 3, 2, 1. 마침내 남학생의 손이 노트북의 트랙패드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래게 움직이던 손가락들은 때때로 멈추어 섰고, 버드나무 잎새처럼 불안하게 떨다가, 다시 엎치고 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모두가 숨 죽이고 지켜보았다. 겨우 2분이나 지났을까, 남학생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나 빼고 다 성공했어요. ”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하이파이브라도 해주고 싶은 걸 꾸욱 눌러 참았다. 남학생은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가슴을 쭉 편 채로 들것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야, 내가 이 교수님 수업 어떻게 신청했는지 알아? ”하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겠지. 찢어진 발가락도 너의 앞을 막지 못했노라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풋풋함이 조금 부러워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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