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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r 05. 2023

하조대(河趙台)

소년은 걸었습니다. 아주 오래. 우주의 나이만큼 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소리를 훔쳐 간 게 틀림없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세상에서 색깔을 하나씩 녹여버렸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파랑, 빨강, 녹색 차례로 사라졌습니다.


자꾸 잠이 와서 눈을 감고 걸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소년은 오래전부터 좋은 냄새를 따라서 걸어왔으니까요. 바로 엄마 냄새였습니다. 엄마에게선 하얀 소금 냄새와 소나무 껍질 냄새가 났습니다.


갑자기 발이 쑥 빠지는 땅이 나타났습니다. 걸을 때마다 모래가 신발 속으로 기어들어왔습니다. 소년은 신발을 벗어서 아무 데나 던져두었습니다. 잃어버려도 상관없었습니다. 신발은 너무 낡았습니다. 소년은 맨발로 엄마 냄새가 진해지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뛰어갔습니다.



소년의 몸에 파도가 끼쳤습니다. 깜짝 놀란 소년은 도망가려 했지만 뒤이어 달려온 파도가 잡아채고, 또 잡아채고, 넘어지는 걸 끌어다 집어삼키더니 이내 푸우 모래 위에 뱉어 놓았습니다. 소년은 눈을 뜨고 엉금엉금 기어 나와 젖은 모래를 털었습니다. 씩씩해서 울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디로 걸어야 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쪼그리고 앉아 조개껍질을 줍는 꼬마가 보였습니다.

얘, 너 우리 집 가는 길 알고 있니?

꼬마는 소년을 슬쩍 보더니 손짓으로 모래 위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엔 파도에 밀려난 조개껍질들이 또르르 모여서 반짝이는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조개껍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심이 되니 또 잠이 몰려왔습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조개껍질 길은 소년의 꿈속까지 이어졌습니다. 반짝이는 길이 꼭 별을 모아 만든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조개껍질 은하수를 따라 걸었습니다.


쿵, 머리를 찧는 바람에 소년은 아파서 눈을 떴습니다. 코 끝이 찡했습니다. 소년은 어느새 꽃밭에 서 있었습니다. 아주 커다란 꽃이었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소리도, 색깔도, 이제는 냄새도 사라져서 조금 슬펐습니다. 집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서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주먹을 꼭 쥐고 울음을 삼켰습니다. 바보처럼 자꾸 잠이 와서 더 속상했습니다. 소년은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걸까요. 뭘 하려고 했던 걸까요. 떠올리려 해도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참았던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누군가 다가와 소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주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손이었습니다. 손바닥에 새긴 주름 하나하나 다 생각이 날 만큼 오래도록 잡아온 손. 그 손은 소년을 천천히 잡아끌어 품에 안았습니다.


엄마의 냄새는 아니었지만 소년이 좋아하는 김치찌개 냄새가 났습니다. 아침마다 함께 걷던 산책길의 풀잎 냄새 같기도 했습니다.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까만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코스모스를 닮은 연분홍색 입술, 그리고 눈, 소년이 사랑한 짙은 갈색 눈. 그녀가 소년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수고했어요. 이제 쉬어요.



20XX 년 X월 X일 심정지 건으로 출동한 사항임. 구급대 현장 도착한 바 최초 심장 리듬 무수축, 턱과 사지의 강직 확인됨. 신고자 말에 의하면 사망자는 치매 노인으로 2일 전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함. 경찰에게 현장 인계 후 미이송 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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