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맞닿았던 순간
나는 너의 목소리가 좋았다.
오래도록 추위에 떨다
어렵게 내놓은 한마디의 울림도,
노래방에서 수줍게 떨리던 음정도
모두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오랜만에 우연히 닿은 너와의 연락에
음악을 한다는 소식이 섞여 있다는 것이
크게 놀랍진 않았다.
나는 지금의 네가 궁금했다.
그때의 목소리는 여전할지
노래하는 네 모습은 여전히 수줍을지
아니면 담백해졌을지.
아니, 사실은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때보다 피부는 깨끗해졌고,
자신감도 훨씬 많아져서
이제는 누가 묻더라도 손을 놓지 않고
너를 당당히 마주 볼 수 있을만한 나를
우연처럼 우리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조차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눈이 부실 만큼 화창한 가을날.
나를 수없이 비추어 봤던 옷가게 유리창에는
셀 수 없는 설렘과 희미한 두려움이 겹쳐 있었다.
그리고 숨차게 달려오는 너를 보는 순간
세상이 회색빛으로 정지되었다가
네가 다가올수록 점차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어?"
너의 물음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몇 년의 시간이 머릿속을 헤집었고,
정말 오래 기다려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처럼 '괜찮아'라고 웃어넘겼다.
너를 다시 만난 뒤로는,
모든 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래서 밥을 먹는 동안에도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노래방에서 너의 노래를 들을 때에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리려 애썼다.
너의 기숙사 근처에서
함께 호수를 걷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오늘'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도, 하늘도 숨죽였던 호수에서
너의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은
조용히 나를 흔들었다.
오늘의 분위기 전체가 너라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너라는 사람을 조용히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오늘 너무 재밌었어, 조심히 들어가."
"나도 너무 재밌었어."
기숙사 앞에서 우리는
마지막 한마디를 나누고도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나 너 정말 많이 좋아했었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나조차도 그 말의 무게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오래 감춰두었던 진심이
고해성사처럼 터져 나왔을 뿐이다.
너의 표정은 기쁜 듯, 슬픈 듯, 오묘했다.
너의 표정을 보고서야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입대가
우리 사이에 현실로 다가올 거라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예전처럼 다시 너의 손을 놓아버리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 내가 놓았던 손이
이번엔 입술로 다시 맞닿았다.
어쩌면 찰나, 어쩌면 영원할 것만 같은
그 순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서 멀어지고,
혹여 뺨을 맞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겠노라
각오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너는 그저 꿈을 꾸듯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너를 보며 나 또한 시간을 잊은 채
오랫동안 행복에 잠겨 있었다.
"버스 놓칠 것 같아서, 먼저 갈게!"
나는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연신 사과하면서도
멀어지는 너를 향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오르던 그 순간,
너의 마지막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너도 지각하지 마. 나만 제때 들어가면 미워할 거야!"
아… 그렇구나. 나는 역시,
여전히,
어지간히도,
너의 목소리를 좋아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