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선고나 불치병 진단을 받은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충격받은 표정이나 현실을 부정하는 대사를 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을까. 산동제를 넣어 확장된 동공이 더 커지기는 어차피 힘들었을 것이다. 녹내장을 진단받았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루 두 번 넣는 안약과 비타민 B3를 복용하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무언가를 보고 난 후 눈을 또 혹사시켰다는 죄책감이 좀 더 든다는 정도였다.
숙이는 동작이 많은 요가가 안압을 상승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오랫동안 다니던 요가원을 그만뒀다. 요가원 사물함을 빼고 오는 길에 헛헛한 마음이 들어 마트에 들렀다. 목적 없이 온 마트행이 그렇듯 어느새 구경에 몰두하던 중 펫코너 한쪽에서 토끼가 든 케이지를 발견했다.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작아 보이는 토끼 두 마리가 톱밥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토끼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케이지 안에서 초점 없이 앉아 있는 토끼는 의욕이 없어 보였다. 집 안에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토끼를 보고 있으니 나도 어릴 적 알고 지낸 토끼가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우리 집토끼는 아니었다. 친구 정이네 토끼였다.
정이네 초록색 대문 앞에 서면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시끌시끌하고 많은 아이들로 정신없던 우리 집과는 다르게 정이와 외할머니, 외삼촌이 사는 정이네는 우리 집엔 없는 고요함이 있었다. 정이가 나와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면 우리는 먼저 집 뒤뜰에 있는 작은 토끼장으로 갔다. 세로로 된 3층짜리 철망집 안에 사는 토끼들은 늘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토끼는 고요한 정이네에 잘 어울리는 조용한 동물이었다. 철망 사이로 뜯어다 놓은 풀을 넣고 있으면 토끼는 그 작은 입으로 조금씩 손에 쥔 풀을 당겨 먹었다. 조용히 먹는 일에 열중하는 토끼를 보고 있으면 열한 살 나의 번잡스럽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요즘 불멍이 유행이라면 나는 당시 토끼멍 정도를 했던 거였다. 고학년이 되면서 내게는 정이보다 더 친한 친구가 생겼고 우리는 점점 소원해져 정이의 토끼를 보러 가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끼에게 풀을 먹이던 평화로운 시간 같은 건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잊고 살았다.
손에 쥔 풀을 입으로 당기며 토끼가 열심히 먹기에 몰두할 때 내 손에는 작은 토끼의 생명력이 전해졌다. 풀을 잡아당기던 작은 힘. 오물오물 거리는, 작지만 지속적인 두근거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토끼가 지닌 에너지가 오롯이 내게 전달되던 순간이었다.
안압을 낮춘다는 안약을 눈에 넣을 때면 안압만이 아닌 기분과 의욕과 에너지와 의지까지 다운되는 것 같은 슬픈 느낌이 들었던 것은 느낌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토끼에게 다시 밥을 주고 싶었다. 다시 토끼의 모든 욕구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토끼 입에 연필을 넣고 돌린다. 나의 토끼는 사각사각 깎여 나가는 연필을 먹는다.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