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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사색 Jan 04. 2022

나만의 정조를 만났다


특별히 이뤄놓은 게 없어 허전함이 커져가던

스물아홉의 어느 날,

고등학교 디자인과 동창 모임에 찾아온

낯선 친구를 만났다.

큰 키에 얼굴이 하얗고 손가락이 길었다.


디자인과 모임에 나온

환경과 졸업생인 그 친구는

3학년때 전교회장을 했고

지금은 동문회를 총괄하고 있다고 했다.

전교회장이었다는데 내 기억 속에

그 친구의 얼굴은 없다.


그에게도 낯설었을 이 모임에 온 이유는

곧 있을 스승의 날을 기념해

디자인과와 환경과 주최로

은사님을 모시는 동문회를

추진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달 여 동안 동문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디자인과 대표로

그 친구와 잦은 연락을 하게 됐고

동문회 이후로도

네이트온 메신저로 연락을 보내 왔다.


동문회 행사 날, 행사 시작 전에 먼저 만나

처음 둘이 먹은 음식은 제육 정식이었는데

멀대같이  키에 1인분의 음식도 

다 먹지 못하고 남기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친구를 위해

여름 새벽에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 아침에도

잠이 덜 깬 상태로

따뜻한 국이 있는 아침식사를 차린다.

식사 후 영양제와 따뜻한 커피까지 내주면

나의 아침이 시작된다.  

 

그 친구는

바쁜 여름에는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여름에 비해 비교적 일이 줄어든 겨울에도

추운 공기를 가르며 새벽 일찍 집을 나선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던 그는

교제 전 내가 제시했던

세 가지 약속을 끝까지 지켜줬던 것처럼

지금도 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힘든 내색 없이 감당하고 있다.


비록 조선의 왕은 아니지만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가정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노력하고 있을

나만의 정조를 나는 날마다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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