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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사색 Jan 12. 2022

엉뚱하고 재미있는 남편이 금고를 사 왔다


만난 지 17년 된 내 남편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권위적이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이건 내가 느끼는 생각이니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30년을 함께 살아온 아빠도 그러했고

나도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는 걸

즐겨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 사람에게 적응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연애할 때 이런 줄 알았다면

...

뒷말은 하지 않겠다.  



그런 남편에게

아빠와는 다른 면이 있었는데

틀에 박힌 고지식한 아빠와는 다르게

조금은 엉뚱하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결혼식을 며칠 남기지 않은

5월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동문회의 정식 일정을 다 마친 후

선생님과 동문들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현수막까지 걸어두고

친구들을 동원해 깜짝 프로포즈를 했다.

나름 공식행사에서 개인적인 프러포즈라니,

나라면 감히 생각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결혼 후에도 계획된 여행보다

갑자기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고

뭔가 아이들 같은 상상력을

직접 실행해 내는 걸 좋아했다.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남편의 실행력은

2주라는 짧은 기간을 준비한

횟집 개업도 가능하게 했다.



코로나로 집콕의 나날들이 계속되고

심심한 하루가 반복되면서

아이들의 파마를 직접 해주고자

필요한 재료들을 사 와서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말아주었는데

도와주던 남편이 결국은 더 잘 말았다.


시작은 항상 내가 먼저 하지만

매번 호응도 잘해 줬고

마무리는 언제나 남편 손에서 끝났다.  

특히 그런 소소한 재밋거리가 생길 때마다

남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최근에는 나 몰래 비비총을 사 와서

셋이서 만들어놓은 과녁을 맞히며

아이가 되어 신나게 논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빠라

아이들이 잘못을 할 때는 따끔하게 혼내서

나보다 더 무서워하지만

언제나 자기 눈에 맞춰서 놀아주는 아빠를

아이들은 좋아한다.  

가끔 초등학생 셋을 키우는 느낌이다.

남편이 구입해 온 비비총은

초등학생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남편이 어제 저녁 퇴근길에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라며 금고를 사 왔다.

금고? 우리 집엔 금고에 넣을만한 게 없는데?

금고 하나로 기분이 좋은 남편에게

적당히 호응해 주고 저녁을 차리는데

저녁식사를 하며 연신 어디에 설치할지

진심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진짜 설치하려고?

오늘 설치하려고?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가끔씩 엉뚱하고 재미있는 남편은

결국 구멍을 뚫어 금고를 고정시키고

앞으로 금고에 넣을 만한 게 더 많아질 거라며

특유의 반짝이는 눈으로 뿌듯해한다.



그래, 당신이 좋다면야.

지금 당장은 금고에 넣을만한게 별로 없지만

올 한 해 금고를 채워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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