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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초록 mocholog Jun 20. 2024

노력이라는 건 이런 거였구나

우울의 안개가 걷히고 또렷하게 바라본 내 일상

여는 말 : 만약 제 글들을 보고 모르던 자신의 정신과적 증상을 깨닫고 치료를 시작하는 분이 계신다면 참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다만 인터넷상의 각종 문서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증세를 확정 지어버리고 끝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특히 ADHD의 경우 - 주의력 결핍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고 개선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말 증상이 의심된다면 빨리 치료를 시작하는 게 인생에 이득! 정량적인 검사 지표와 전문의의 진단을 신뢰합시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걸까


나의 첫 정신과 약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났다. 지나치게 모든 것들이 평온했다. 정말 이상했다.


일어나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들을 차분하게 치우고, 요리를 하려고 양파와 당근을 썰었다. 처음 보는 가지런한 형태였다. 레시피를 죽어도 못 지키던 내가 프라이팬을 충분히 예열하고, 다 쓴 조리기구나 양념을 바로바로 넣어두고, 설거지를 바로 하면서 요리를 했다. 맛있었다. 거울을 보니 언제나 경직되어 있던 무표정이 이상하게 편해 보였다. 내 주변 사람은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정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던 걸까.


혼란스러운 기분을 정리하려 집 앞 산책로로 나갔다. 돌다리가 보여서 건너 보기로 했다. 나는 돌다리를 정말 잘 못 건넌다. 한쪽 발을 뗀 채로 파들파들 떨고 있어서 지나가던 행인분께서 성큼 다가와 손을 잡아주신 적이 여러 번 있었을 정도. 그날 나는 돌다리를 10초 만에 건넜다.


언제나 머릿속에서 떠들던 생각들이 어디론가 문을 닫고 싹 사라졌다. 엄마에게 전활 걸어 보았다. 말을 더듬거나 횡설수설해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쏙쏙 골라서 했다. 신기해서 남자친구에게도,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다.


'나 뭔가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아?'

'그러네. 횡설수설하질 않아'

진짜였다.


글을 써 보았다. 국어 과목에서 늘 좋은 점수를 받긴 했으나 막상 내가 글을 쓸 때에는 문단의 구성과 글의 주제 구성법을 배워서 대체 어떻게 써먹는 걸까 늘 고민하다가 내 멋대로 글을 썼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만 줄줄 풀어도 일기장을 빼곡하게 몇 장 채우고, 할 말이 더 많지만 팔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곤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 손에 비해 생각이 너무 빨라서 휘갈겨 쓰다 힘들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내가 쓰려는 말이 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책을 읽었다. 한강 작가의 <흰>이었던 것 같다. 뭐든 책 한 페이지를 3초 만에 넘기던 나는 한 줄 한 줄 집중해서 책을 읽었고, 문학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깊게 느꼈다. 글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읽다 말고 한참을 울었다. 나 책 좋아하는데.


내 원래 상태는 이런 거였을까. 지금까지도 별 문제는 없이 살아왔는데 더 멀쩡하게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21살이 지나가기 전에 - 어쩌면 일찍 깨달았다는 다행스러움과 행복함, 영원히 모르고 살아왔을 수 있다는 일종의 분노, 지금까지 노력해 온 것에 대한 약간의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와서 순간순간 이상한 표정으로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지금껏 뭘 해도 튕기듯 다시 돌아와 버리는 기분이었다. 안 되는 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수십 권 쌓아놓고, 읽고, 메모를 하면서 방법을 찾아냈다. 그렇게 읽은 자기 계발서만 100권은 거뜬히 넘겠지. 자기 계발서 - 누군가는 도움이 안 되는 책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잘 맞았다. 책을 읽고 바로바로 적용해 얻은 습관과 팁들도 머릿속에 수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제 튕기지 않는 노력을 하나하나 쌓아갈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내가 이때를 위해서 모두 저장해 놓은 것 같아.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양극성 장애 2형


양극성 장애 2형, 즉 조울증을 나의 지식 선에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 경조증 삽화와 우울 삽화가 번갈아 일어나는 형태. 1형의 경우 경조증보다 심한 조증 삽화가 특징이며 2형은 우울 삽화에서 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우울증과 구별 불가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울증으로 치료받다가 조증 삽화가 찾아오면 상태가 괜찮아진 줄 알고 치료를 중단, 우울삽화가 돌아와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가 제법 많다고 한다. 나의 경우 우울 삽화 시즌에 한참 치료를 고민하다 조증 삽화가 찾아오면 '내 노력이 부족했나 봐' 라며 치료 생각을 싹 거두기를 수없이 반복해 온 것. 아무리 간헐적이라도 지금까지 나에게는 파괴적인 우울이 매번 찾아왔으니깐, 충분히 치료받을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며 병원에 간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께 이 이후 '제가 정말 양극성 장애가 맞나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비싼 뇌파 검사가 있긴 한데 굳이 추천하지 않고, 효과가 있다면 그냥 계속 치료하면 된다는 답변을 주셨던 것 같다. 환청, 환각, 망상 등의 명확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신과에서는 어떤 명확한 선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양극성 장애 2형 환자'로 정의하고 있지만, 더 심한 증세를 갖고 있는 분께서 보았을 때에는 이 정도로는 택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건 내 인생이라는 거다. 증상의 경중으로 '그 정도로는 우울증이 아니야'와 같이 판단할 수 없고, 치료를 받으며 내 인생에 변화가 있다면 그 이름은 의미 있는 게 아닐까. 모든 판단은 전문의가 대신해 줄 것이다. 전문의와 현대의학을 믿어요! (다만 정말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한다면 검사도 해 보고 다른 병원에도 찾아가 보자. 환자의 설명을 통해 진단을 내리기 때문에 전문의마다 견해가 제법 다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해


현재 의사 선생님(이때와 다른 분)께 '저는 그럼 영원히 약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란 질문을 했었다. 말씀해 주신 것은 - 이건 간단히 설명하면 뇌에 스파크가 튀는 질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고, 중요한 건 스파크가 튀는 과정에서 뇌에 무리가 간다. 약은 이 스파크를 줄여주는 역할이기에 뇌에 무리도 덜 갈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약을 꾸준히 먹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는 답변을 해 주신 적 있다.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ADHD 진단도 받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다. 약을 많이 줄이긴 했지만, 아마 아예 끊진 않을 것이다. 잠깐 약을 끊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이후 글들에서 이야기해 볼 예정이다. 참고로 이 정도의 드라마틱한 상태는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처음 약을 먹은 버프 효과였던 건지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지금은 다양한 노력을 하며 주의력과 감정기복을 조절하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시작한 치료가 너무 재미있었다. 관심도 할 말도 너무 많아 쌓여 있지만 혹여나 내 인생에 손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굳이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브런치북 제목대로 <사랑하는 나의 정신병에게>. 결국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그냥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기록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조그마한 위로 또는 도움이 되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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