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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초록 mocholog Jun 13. 2024

어찌 됐든 병원에 가 보는 게 낫겠다

정신과에 첫 발을 들이다

대학교 1학년 방학 어느 날이었다. 무더운 8월로 기억한다.


1. 이상함을 깨닫다


자취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뭐 때문일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저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어제까지는 행복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 러닝을 30분 뛰고, 슈퍼에서 잔뜩 장을 봐서 예쁘게 플레이팅 한 후 요리를 해 먹고. 또 어떤 활동을 해볼까 행복하게 고민하고. 조리대에 먼지 한 톨 없고 광이 날 때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토퍼에 누웠다. 오늘처럼만 살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럴 때 드는 생각은 - 머리스타일을 바꿀까? 아니면 새로운 취미를 해 볼까. 집 구조를 바꿔볼까. 글을 쓰면 기분이 나아진다던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길 가다가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니 괴로웠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지?  얼굴을 만지다 거슬리는 부분을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 저번에는 이럴 때 바깥에 가서 쇼핑을 잔뜩 해 왔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인생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소중한 관계들도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나 혼자만 있어도 될 것 같아.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풉, 하고 웃는다.


병원에 가 볼까, 상담을 받아 볼까 고민은 수도 없이 해 왔다. 그러나 항상 2주 정도 지나면 괜찮아졌고, 역시 나의 의지 문제였군! 열심히 살아보자면서 또 행복한 삶을 즐겼다. 그러다 또 우울해졌다. 아 내가 운동에 너무 소홀해서 그런가. 역시 근육이 부족해서 그래. 또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역시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닥치는 대로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는다.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노트 양면 7장을 작은 글씨만으로도 꽉 채운다.


갑자기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못난 것도 아닐 테고. 충분히 많은 걸 하고 있는데 왜 우울할까. 남들도 이만큼 우울할까? 친구에게 물어봤다. 갑자기 눈물이 날 때가 있어?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그저 우울해서 어제까지 하던 걸 싹 다 놓아버릴 만큼 우울할 때가 있어?


"아니?"


우울증 체크리스트를 찾아봤다. 아니,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 다 체크해야 되는데? 신빙성이 없군.... 친구에게도 체크리스트를 보내 봤다.


"난 하나도 해당 안 되는데?"


이상하다.



2. 득실을 따져보다


내가 조금 이상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다들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애써 컨트롤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럼, 만약 내가 진짜 우울증이라면? 행복한 시기에는 난 누구보다도 자신 있고,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데 불시에 찾아오는 우울함이 그 모든 걸 무너뜨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틈을 막아줄 수 있는 두꺼비를 외면하고 있는 거라면?


정신과에 가길 누구나 망설이는 이유. 취업할 때 불리하대, 보험을 못 든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열람이 안 돼서 괜찮다고는 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굳이 미래에 해가 될 만한 거라면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그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일까. 고민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실비보험 들어져 있어?"

"들어있지? 왜?"

"아 인터넷 보다가 그냥 궁금해져서."

"그래~"


실비보험을 먼저 들고 병원에 가라고 하던데, 처리 완료. 내가 정말 변화할 수 있다면, 취업에서 불리해지고 보험을 더 못 들더라도 그게 더 나은 거 아닐까? 각종 리스크들을 싹 체크한 뒤 각오를 했다. 가야겠다. 우연찮게도 우리 집 건물 30초 거리에는 오래된 정신과가 하나 있다.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비보험으로 진료가 되나요?"

"되긴 하는데... 많이 비쌀 거예요. 그냥 보험으로 하시는 게 나아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진료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처음이어서요"

"예약 없이 그냥 오셔도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약 없이 바로 초진을 받을 수 있는 정신과가 코앞에 있는 건 참 행운이었다. 초진 예약을 기다리다가, 혹은 병원이 멀어서 방문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 전화를 끊자마자 눈 딱 감고 집에서 입던 츄리닝 차림 그대로 나갔다. 방문 연령층이 높은 병원이라 그런지 나를 보고 조금 놀라신 눈치. 아까 전화하신 분? 뭐 때문에 오셨어요? 아... 그냥 좀 불안하고 갑자기 울고 그래서... 왔어요. 이게 이유가 될까? 하는 생각에 말을 더듬었다. 편안한 분위기의 병원. 조금 앉아서 기다리니 내 이름을 불렀다.


푸근한 인상, 회색과 흰색이 골고루 섞인 머리카락을 푸슬푸슬하게 묶고 계신 중년의 장발 의사 선생님. 뭐 때문에 왔어요? 아... 그냥 갑자기 울고요. 좀 불안하기도 하고. 안 그럴 때도 있긴 한데..... 스테이플러로 집어져 있는 줄 노트 양식 A4용지에 만년필로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기셨다. 어, 인터넷에서 정신과는 상담 안 해준다고 했는데. 어느새 내 이야기를 줄줄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냥 가라고 하실 줄 알고 조금 긴장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나에게 양극성 장애 2형이라는 병명을 붙여 주셨다. 아, 조울증이라고요? 제가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셨다. 병원 내에서 약을 바로 주셨다. 신기했다. 제법 레트로한 흰 봉투와 반투명 약봉지. 집에 돌아가서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한 봉지를 뜯어 털어 먹었다. 하루아침에 '정신병 환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신기했다.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진료 때 들은 이름과 약 생김새를 통해서 무슨 약인지 찾아냈다. 약 이름과 용량, 생김새를 노트에 적어두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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