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는 익숙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에 들어갔다. 자주 눌렀던 그 비밀번호가 지금은 기억나질 않길 바랐으나 손가락은 그런 마음을 모르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민희는 머뭇거리다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한 걸음씩 올라갈 때마다 민희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시 내려갈까 짧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도 꽤나 용기를 내었던 일이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춥게만 느껴지는 4층에 도착했다. 계단 바로 앞이 목적지인 401호였다. 한 때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집앞이라 좋아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민희와 현관문 사이의 간격은 실제로 1미터도 안되었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 멀었으면 했다. 너무 멀어서 걷다가 도중에 힘이 빠져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숨을 푹 내쉬던 민희는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그 비밀번호를 힘겹게 꾹꾹 눌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 현관과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다. 민희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이 이렇게 넓었던가? 이 넓은 집을 가득 채운 건 먼지 뿐이었다. 뿌옇게 떠다니는 먼지들이 빛에 반사되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한참을 서서 문턱 너머의 먼지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발을 힘주어 들어 그 너머로 넘어간다.
민희는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10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세 사람에게 이 공간은 그냥 집이 아니라 안식처였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담겼던 고향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이 곳으로 왔다. 새로 이 집을 계약했을 때는 영원히 셋이서 함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지.
민희는 신발을 벗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신고 들어가기로 했다.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엄마는 청소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먼지가 쌓이면 쌓이는 대로 그대로 두곤 했다. 같이 먼지도 털고 정리 좀 하자는 민희의 말에 엄마는 웃으며 ‘지금 이 순간을 담은 먼지인데 이 먼지를 치우면 어떡하니.’ 하며 말하곤 했다. 그냥 청소하기 싫은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뭔가 후련해보였다. 몇 십년을 집안일만 하며 살아왔던 엄마이기에 엄마 나름의 저항인가 싶었다.
그때의 엄마가 한 말이 지금에서야 사무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민희는 엄마가 주로 쓰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공기 중에 가득한 먼지 냄새가 났다. 자기만의 방이 처음 생겼다며 어린아이같이 좋아했던 엄마의 모습이 먼지 속에 담겨 있었다. 민희는 집안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엄마가 남기고 간 순간의 먼지를 보고 느꼈다. 이곳을 이미 떠나버린 엄마는 무엇으로 우리와 함께한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걸까.
민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쾌청한 하늘을 보니 엄마가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창문을 하나둘 열기 시작했다. 모든 창문이 열리자 시원한 바람이 집 안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뿌옇던 집 안이 이내 깨끗해졌다. 민희는 간절히 바랐다. 엄마와 우리의 순간을 담았던 이 먼지가 꼭 엄마에게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