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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Feb 01. 2019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그 필연적 탄생


그 필연적 탄생 : Made in Italy! Futurismo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는 어떻게 패션의 종주국이 되었을까요?


패션 하면 떠오르는 밀라노, 명품으로 가득 찬 쇼핑의 나라 이탈리아! 일 년에 두 번 밀라노 패션위크가 열리며 다양한 패션 관련 박람회와 행사 개최로 세계 패션을 주도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상징적인 꿈의 나라죠. 그렇다면 이들은 처음부터 세계의 패션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을까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들 또한 옆 나라들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탈리아 패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시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세기 이전까지 - 중세 이후- 는 딱히 이탈리아 패션이라 칭할만한 현상은 없었습니다. 거의 항상 주변 유럽 국가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받아들여 그대로 입거나, 여러 나라를 거쳐오면서 조금씩 변형된 스타일을 입었었죠. 여러 도시 국가로 존재했기 때문에 간혹 자체적으로 만들어 유행하거나 주변 국가에 영향을 준 몇몇 아이템과 스타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거창하게 이탈리아 스타일이라 부를만한 패션은 없었습니다.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나라는 스페인, 프랑스와 영국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여인들은 르네상스 시절엔 주로 스페인에서 이후엔 프랑스·영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 하기 바빴고, 유행을 위해서라면 시간이나 거리의 차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좀 늦게 유행이 퍼진다는 것뿐.. 그러다 고맙게도 인쇄술이 발달해 잡지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180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첫 여성 잡지인 ‘Corriere delle Dame’(1804)가 출간되었고, 이 잡지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최신 패션 스타일에 대한 자세한 기사와 일러스트가 실려 이탈리아 여성들의 패션 가이드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물론 이탈리아 패션에 대한 기사도 있었으나.. 현대의 여성들이 프랑스, 이탈리아 패션에 열광하듯 그 시절 이탈리아 여성들은 프랑스, 영국 패션에 열광했기 때문에 잡지의 대부분은 그들의 스타일에 치중했지요. 하지만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있는 현상은 없죠. 변화가 시작됩니다!



Futurismo; 미래주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산업은 급속도로 발달했고, 사람들은 속도, 기계, 도시와 같은 새로운 것들을 찬양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엔 전통에서 벗어나려 하는 움직임이 꿈틀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죠.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을 잇는 찬란한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이지만, 바로 이러한 전통을 부담스러워하며 벗어나려 하는 움직임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감수성은 새롭게 갱신되었다'는 이론에 기초하며 ‘새로운 것’, ‘재생’에 열광했습니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마음속에 꿈틀대는 이 현상을 뭐라 명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들은 딱 맞는 이름을 붙이죠. ‘Futurismo’!! 영어로는 Futurism, 미래주의입니다.




미래주의는 1909년 ‘마리네띠(Filippo Tommaso Marinetti)’가 여러 이탈리아 일간지에 ‘미래주의 선언문(Manifesto Futurista)’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2월 20일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인 ‘르 피가로(Le Figaro)’에도 광고기사를 내면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립니다. 1912년에는 무려 120,000명의 미래주의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시인, 화가, 음악가, 푸드 스타일리스트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하고도 이상한 일들을 했습니다. 언어 혁신 프로그램 같은 것도 만들어 문법을 다 파괴해 무작위로 배치해서 쓴다거나, 무한대로 동사를 사용한다거나,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방식을 지침서로 정리해 잡지에 기고했으며 심지어 식생활에도 통제가 들어갑니다.



‘미래주의 요리 선언문(Manifesto della Cucina Futurista)’를 발표해 전통적인 주식인 파스타를 반대하면서 분말, 알약 등으로 만든 화학적 음식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영양분을 계산해서 먹는 방식 폐지! 미각의 즐거움 폐지! 같은 주장을 하죠. 대신 완벽한 식사를 위해서 음식의 색과 테이블 세팅의 조화, 음식의 독창성 등을 내세우며 플레이팅을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꾸미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책도 냅니다.

그들은 좀.. 그랬습니다.



MODA FUTURISMO


이들은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탈리아 패션에서 ‘Made in Italy’ 첫 부분이 바로 이 미래주의에서 시작되죠.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근세까지 주변 나라 따라 하기나 바쁘지.. 이렇다 할 자신들 만의 스타일이 없어 꽤나 자존심이 상해있던 이탈리아는, 좀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멋에 취해 예술활동을 펼치던 이 미래주의와 손잡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패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 선두에 강아지의 발과 꼬리 움직임의 역동성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 예술가 ‘쟈꼬모 발라(Giacomo Balla)’가 있습니다. 강아지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확 오네요. 지금이야 이런 표현이 익숙하지만 저 시대에 움직임을 저런 식으로 표현한 건 대단한 관찰력과 표현력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일단 뭐든 선언부터 하고 봤습니다.

발라 또한 1914년 ‘미래주의 패션 선언문(Manifesto della Moda Futurista)’를 일간지에 발표하지요. 그는 ‘Si pensa e si agisce come si veste(입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면서 당시 남성들이 입는 옷들은 지루하고 우울하다며 중성 색조나 대칭되는 디자인에서 벗어나 컬러풀한 색조에 재밌는 그림이 있고 비대칭적인 옷을 입자고 제안합니다. 선언문에 그려진 슈트 디자인을 보면 다이내믹한 패턴에 소매 끝과 바지 끝단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미래주의자는 신발도 짝짝-모양과 색상을 다르게-으로 신어야 한다고도 주장하죠.



그는 산을 위한 상의, 바다에서 썬텐을 위한 의상 등 미래주의 남성들을 위해 다양한 디자인을 제시합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겠지만.. 별로 입고 싶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주목해야 할 미래주의 디자이너로는 피렌체 출신의 종합예술가 ‘타얏(Thayaht;예명)’으로 알려진 Ernesto Michahelles입니다. 그는 1919년 점프수트인 ‘뚜따(Tuta)’를 디자인하죠. '이탈리아 패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미래적인 옷'이라 설명하며, 이탈리아어로 '모두'를 뜻하는 'Tutta'*에서 중간 t를 뺀 신조어를 만들어 'Tuta'라 이름 지었습니다.



Tuta는 누구나 입을 수 있게 디자인된 아주 간단한 T자 모양의 옷으로, ‘한 장의 천을 직선으로만 재단하고 봉제해준 뒤, 앞단에 7개의 단추를 달고 벨트를 매는..’ 타얏은 전략적으로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디자인하죠. 형태를 혁신적으로 바꿔 기능성과 실용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타얏의 반부르주아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여성을 위한 ‘Tuta’도 있었습니다.



모양은 이랬죠. 그는 이렇게 모두가 ‘Tuta’를 입는 멋진 세상을 꿈꿨습니다. 일간지 ‘La Nazione’는 1920년 ‘Tuta’를 대대적으로 발표하며 널리 확산되어 유행이 되길 바랬지만 특별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타얏은 1918년 파리로 가 작품 활동을 하며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프랑스 디자이너 ‘비요네(Madeleine Vionnet)’와 교류하며 그녀를 위해 로고를 디자인해주기도 하죠. 로고가 참.. 미래주의 틱 합니다. 그는 1925년까지 비요네의 아틀리에에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컨설턴트로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 ‘데페로(Fortunato Depero)’가 있습니다. 그 또한 종합예술가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중 패션과 관련하여 데페로는 1917년부터 바느질된 직물을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테피스트리, 매트, 쿠션 등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지게 되죠. 1919년에는 아내(Rosetta)와 함께 밀라노와 베네치아 중간쯤에 있는 작은 도시 Rovereto에 아틀리에 ‘Casa d’Arte Depero’를 만들어 다양한 작업을 했습니다. 지금은 3000여 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이 되었죠.  



데페로는 특히 광고 분야에 크게 기여합니다. 보그나 베니티 페어 표지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Campari 소다병을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마리네띠나 발라 등 미래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위해 질렛을 디자인해 일종의 유니폼처럼 모두 다 같이 입고 다니며 자신들의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데페로가 디자인한 질렛을 입은 데페로와 마리네띠 입니다.

그들은 1924년 밀라노에서 있었던 미래주의 모임에서 조끼를 입고 도시를 산책했는데, 이는 당시 엄격했던 부르주아들의 옷차림에 반대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리고 이 조끼들은 미래주의자들의 의상 중 유일하게 아틀리에를 벗어나 거리로 나온 작품이었죠. 데페로 외에도 열정적으로 미래주의적 의상을 디자인한 예술가들은 많았지만.. 그 옷들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닐 만큼 용기가 넘치진 못했습니다. 다들 놀란 토끼눈으로 보거나 이상한 눈초리로 봤기 때문이죠. 현대의 시각으로 봐도.. 한 번쯤은 쳐다볼 것 같습니다. :) 앞서 소개한 발라 또한 자신의 옷과 딸을 위한 원피스도 디자인했지만, 그저 개인적인 공간에서 입어보는 수준이었죠.


* Tutta - Tutto(모두, 다)의 여성형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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