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DA Feb 25. 2019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그 치밀한 침투


그 치밀한 침투 : Sartoria - Stilista


그러던 어느 1951년 2월 피렌체, 드디어!!

그간 행해지던 모든 노력을 통틀어 이탈리아 패션을 새로운 단계로 이끈 기념비적인 패션쇼가 열립니다.


미래주의는 패션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적인 시도였고, 정부 차원에서 개최되었던 이 전의 패션쇼들과 토리노 중심의 사업들은 정부가 이탈리아 패션의 시작이라는 확실한 지침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 패션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강요에 의한 쓰임이 있었다고 그것을 하나의 패션 스타일의 탄생으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으며, 우리 동네에서 유행했다고 시대의 패션이라 부를 수는 없지요. 물론 이 모든 단계들은 ‘이탈리아 패션’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 변화하는 과정들이었음엔 틀림없습니다.


미래주의가 이탈리아 패션으로 향하는 시동을 킨 것이라면, 독재정권은 패션산업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다시 한번 불러 모아 목적지까지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가 나타나죠. 초시가 잦으면 급제가 나기 마련입니다.


'이탈리아 패션에 세계가 주목한다' (좌) ㅣ  G. B. Giorgini con le modelle, 1956 (우)



‘세계의 눈이 이탈리아 패션에!’, 실제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은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 경제를 살리려는 움직임으로 꿈틀댔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는 패션이 보기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장소로 적절해 보였습니다. 일명 '13 사도' -9명의 디자이너와 4개의 패션 하우스- 라 불리게 될 당시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디자이너들은 피렌체의 사업가 지오르지니(Giovanni B. Giorgini)의 지휘 아래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하죠.



Padre della Moda Italiana - 이탈리아 패션의 아버지 등장



이탈리아 패션의 아버지이자 ‘Made in Italy 대사(Ambasciatore del Made in Italy)’라 평가받는 사업가이자 문화적 명사였던 지오르지니에게는 이탈리아 패션이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등장은 훌륭한 성과로 이어지죠.



그는 다양한 경험들로 쌓은 국제시장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1951년, 이탈리아 패션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패션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그는 큰 고객인 미국인들이 조만간 프랑스 패션에 지루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을 것이라 생각, 그 틈을 이탈리아가 파고들길 바랬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전쟁은 거추장스러운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에 더 가치를 두게 만들었고, 패션시장은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었죠. 또한 전쟁으로 프랑스의 많은 패션 아뜰리에가 폐쇄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는 새롭게 뜨는 시장으로 뛰어난 상품에 가격도 저렴했죠. 오랜 전통의 장인 정신, 거기에서 비롯되는 우아한 취향, 품질이 보증되는 재료, 저렴한 노동력을 모두 갖춘 매력적인 시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대적인 상황도 이탈리아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Gli Stilisti, Life, 20 August 20. 1951


하여 지오르지니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수립하죠. 먼저 그는 당시 활동하던 중요한 이탈리아 재단사 13명을 추려 ‘우리 함께 손잡고, 저 프랑스는 벌써 해낸.. 우리의 패션으로 세계를 제패해보자!’라는 편지를 보내 그들을 독려하며 쇼에 선보일 의상을 만들도록 설득합니다.



E. Pucci, Le sorelle Fontana, Jole Veneziani

거기에는 당시 유명했던 Fontana 세 자매, 떠오르던 샛별 Pucci, ‘스타들의 재단사’라 불리던 Schuberth, 밀라노에서 활동하던 디자이너 Veneziani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세계 시장을 향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무쏠리니의 강력한 반대로 프랑스 패션을 따라 하지 못하자 자신들만의 디자인을 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드디어 빛을 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거죠.


동시에 미국과 캐나다의 힘 있고 부유한 수입업자와 백화점 바이어 10여 명에게 이탈리아에 잠시 들러 쇼를 봐달라 설득하는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컬렉션이 열리는 시기에 딱 맞춰 일부러 쇼를 기획하죠. 파리 패션쇼를 본 후 자연스럽게 이탈리아로 올 수 있게 동선을 맞춘 겁니다.


패션쇼 초대장, Archivio Giorgini


초대장에 있는 그림은 1506년 Raffaello Sanzio가 그린 Maddalena Strozzi유럽 문화를 꽃피웠던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패션의 문화적 모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우리가 유럽 문화의 원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문화적 자긍심을 은근히 내비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쇼의 주최자 지오르지니는 초대장에 ‘..우리 패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이라며 그 목적을 정확히 명시해둡니다.  


Firenze, 8. 1944년 피렌체에 진입 중인 연합군

패션쇼의 타겟은 새로운 거대한 시장 ‘북아메리카’였습니다. 일찍이 미국 시장을 경험했던 지오조르지니에게는 이탈리아의 장인정신이 국제시장에 통할 거라는 선구안이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해외로의 진출은 용이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 이탈리아에 들어와 있던 연합군과의 인연이 전쟁 후 미국과 캐나다로 진출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집까지 패션쇼 장소로 제공하죠. 고대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부자인 데다 문화적 명사로 아는 사람도 많았던 그는 자신의 인맥과 자산을 이탈리아 패션 부흥을 위해 아낌없이 발휘합니다.



Giorgini 집에서 열린 이탈리아 패션의 첫 패션쇼, Firenze, 1951


12일과 14일 이틀 동안 그의 집에서 열린 쇼는 캣워크도 없이 의자들 사이로 난 공간으로 모델들이 워킹하며 의상을 선보였고, 14일 쇼의 피날레에서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 화려한 막을 내렸습니다.


파티를 즐기는 미국 바이어들과 디자이너 Simonetta, 1951

쇼가 끝난 후 이어진 파티의 드레스 코드는 '순수하게 이탈리아에서 영감 받은 옷'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이탈리아에 의한, 이탈리아를 위한' 지오르지니의 순수한 열정과 치밀한 계획은 그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고, 그에게 'Padre della Moda Italiana이탈리아 패션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선물하죠.


쇼의 감상을 묻는 지오르지니에게 I. Magnin 백화점 바이어 Stella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탈리아 하이패션(Alta moda) 탄생의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때가 드디어!! 프랑스 패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에 의한 이탈리아 패션이 시작된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들은 더 이상 Sartolia(재단사)가 아닌 Stilista 즉, 디자이너라는 단어로 표현이 되죠. 재단사에서 디자이너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후에 방송 인터뷰에서 지오르지니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평가받는 그 떨리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말대로 결과는 같은 해 7월에 열린 쇼가 증명해주었습니다.


Sala Bianca Palazzo Pitti, Firenze (좌)  ㅣ  Life Magazine, August 20. 1951


규모가 커진 쇼는 Palazzo Pitti로 장소를 이동해야 했으며 15개의 패션 하우스가 참가했고, 10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던 바이어들은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Bettina Ballard' 보그 편집장과 'Carmel Snow'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 몸소 이탈리아로 행차해주셨죠. 진정한 이탈리아 하이패션의 탄생이었습니다.


Festival della moda italiana, Firenze,  7. 1951


지금과는 달리 쇼 도중에 바이어들은 옷감을 만져보기도 하고 디자이너가 의상에 대해 직접 설명하기도 하는 등  토론회장을 방불케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700여 벌의 의상이 선보여졌습니다.


때를 만난 그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늘어나는 관객들로 인해 1952년부터는 Palazzo Pitti로 아예 장소를 옮겨 개최했으며 섬유 업계와도 협력하여 다양한 프로모션도 진행되었고, Pucci, Krizia, Valentino.. 같은 많은 스타 디자이너들도 탄생시키며 연 2회 열리는 행사로 자리매김하죠.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Google Images

Istituto Luce

매거진의 이전글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그 승리의 전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