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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May 02. 2019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그 적절한 활용


그 적절한 활용 : Il Film e La Moda

 

50년대 이탈리아는 전반적인 문화산업들이 급성장을 이루며 유럽 문화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여기엔 영화산업이 크게 기여하죠. 영화 속 스타들 뿐 아닌 이탈리아 자체가 매력적인 주인공이었습니다. 정부는 유행이 퍼지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인 스타마케팅을 적절히 활용하여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이탈리아에 대한 로망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1953) 속 아름다운 헵번 공주가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오토바이 ‘베스파 (Vespa)’를 타고 로마의 거리를 누빈다던가, 젤라또를 입에 물고 스페인 광장을 거닐고,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à)’ 앞에서 장난치던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소피아 로렌, 롤로 브리지다와 같은 이탈리아 여배우들은 풍만한 몸매와 이국적인 외모, 독특한 매력으로 헐리우드를 평정하기 이르렀죠. 로마엔 거대한 영화사가 차려졌고 로마의 상징적인 거리 ‘via Veneto’의 레스토랑과 호텔은 연일 헐리웃 배우들로 북적거렸으며, 그들을 찍는 ‘파파라찌 (Paparazzi)’라는 새로운 무리는 특유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미국의 영화 배급사들도 로마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헐리우드는 이탈리아를 무대 삼아 많은 영화를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롭게 뜨고 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고객을 자처했으며, 그것은 서로에게 좋은 윈윈 전략이었죠. 잘 나가는 헐리웃 스타라면 이탈리아에 들러 인증사진 한 번쯤은 찍어줘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비슷한 서양문화권 사람들의 눈에도 이탈리아는 조금 특이하고 재밌는 나라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사진작가 Ruth Orkin의, 길거리 모든 이탈리아 남성들의 노골적인 시선과 캣 콜링을 당하고 있는 미국 여학생의 불쾌감 섞인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이 일상적인 사진 속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성적 유희에 대놓고 개방적이며 음악과 술을 즐기는 흥겨운 민족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유럽의 역사가 숨 쉬는 나라 이탈리아를 좋아했죠. 그것은 어쩌면 당시 콧대 높은 프랑스에서 받은 은근한 문화적 열등감을, 같은 유럽이지만 과장된 제스쳐와 표현력으로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가진 이탈리아에서 위로받으려는 심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은 적절하게 맞물려 돌아갔고 이렇게 시대적인 도움까지 받은 이탈리아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CINECITTA’: 이탈리아 선전


이 모든 시작에는 패션과 마찬가지로 무쏠리니 정부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독일이 히틀러의 통치 아래 나치의 위상을 알리고 게르만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선전영화를 제작하고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던 것처럼, 동반자였던 무쏠리니 또한 권력을 잡자마자 '영화는 국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 공표했을 만큼 영상과 이미지가 미치는 영향력을 믿었습니다.



파시스트 정권은 먼저 1923년 L’Unione Cinematografica Educativa(LUCE) 교육영화 연합’을 설립해 그들의 업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으며, 1932년에는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베니스 영화제를 개최해 이탈리아 영화산업을 세계적인 무대로 확장시킵니다. 1937년에는 로마에 Cinecittà라는 영화 스튜디오를 열어 본격적으로 선전도구로서 영화를 활용하기에 이르죠. 다만 나치즘처럼 영화를 정치적인 선전의 노예로 삼았다기보다는 ‘이탈리아’라는 제품을 세계에 알리는 선전도구로 영화 자체에 좀 더 집중했습니다.



특히 정권의 수장 무쏠리니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이 깃든 영화가 전 세계로 퍼지길 바랬습니다. 하여 제작환경에 상당한 자율성을 제공했고,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예술의 혼을 불태울 수 있었죠. 그 시절 Cinecittà 에는 Federico Fellini, Roberto Benigni, Alberto Sordi와 같은 유명 감독들과 Sophia Loren, Gina Lollobrigida, Claudia Cardinale 등 유명 배우들이 일했으며, Martin Scorsese, Francis Coppola와 같은 유명 외국 감독과 배우들도 함께 작업하며 많은 명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엔 ‘쿠오 바디스’나 ‘벤허’처럼 당시의 블록버스터급 미국 영화들이 Cinecittà에서 제작되었고, ‘Hollywood sul Tevere* (떼베레의 헐리우드)’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당시 로마는 유럽의 헐리우드였습니다.



* Tevere: 로마를 지나는 강으로, 옛 로마제국을 있게 한 젖줄




영화와 패션의 시너지: La Dolce Vita


영화 산업에 붐이 일어나면서 당시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은 영화 의상 제작에 참여하거나 배우들과의 인연을 맺으며 명성을 쌓아갔고, 배우들이 보여주는 멋지고 아름다운 이미지는 그대로 이탈리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영화와 패션은 단짝이 되어 손잡고 힘차게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중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 'La dolce vita'를 보면..

Federico Fellini(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La dolce vita(달콤한 인생)’는 50-60년대 로마의 모습을 잘 묘사한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영화로 특히 '관능미란 이것이다!' 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스웨덴 여배우 아니타(Anita Ekberg)가 트레비 분수에 뛰어들어 ‘Marcello~ Come here, hurry up!’하며 외치는 장면은 많은 뭇남성들까지 분수대로 hurry up 하게 만들었죠.



Marcello~ Come here, hurry up!


불안정한 심리 속 인간들의 전혀 달콤하지 않은 인생을 보여주는 펠리니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전쟁 후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50-60년대 이탈리아의 씁쓸하고 퇴폐적인 이면까지 잘 드러낸 영화로, 당시 로마의 Veneto 거리에서 활동하던 파파라찌의 활약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감독이 묘사한 -스타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상황에 상관없이 카메라부터 들이밀어 그들의 모습을 찍어대던- 사진기자들은 영화 이후 ‘Paparazzi(파파라찌)’로 명명되어 그들이 갖는 특징과 명칭이 정해졌죠.



펠리니 감독은 극 중 사진작가의 이름을 ‘Paparazzo’로 지었는데, 바로 이 이름이 파파라찌의 유래가 됩니다. 감독이 매번 다르게 말하는 걸 재밌어 한 까닭에 파파라쪼의 탄생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작은 모기과인 ‘Pappatacio’와 소년을 뜻하는 ‘Ragazzo’가 합쳐져 Paparazzo가 된 것으로 봅니다. 이탈리아어 특성상 단어 끝이 ‘i’로 바뀌면 복수가 되니.. 극성스러운 ‘모기떼’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La dolce vita, 1960

이 파파라쪼를 포함한 극성스러운 사진기사들은 극 중 미국 여배우 ‘Sylvia(실비아)’의 등장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실비아 역할을 맡은 아니타의 관능적이고도 매혹적인 모습은 그녀가 입은 의상들로 캐릭터가 완벽하게 표현됩니다. 그녀의 외모가 다했지만 드레스도 열일을 하죠. 분수대에도 들어갔다가 춤도 췄다가..

검은 벨벳에 미색의 실크 레이어가 섞인 드레스는 맨발의 그녀가 흥에 겨워 춤출 때 그녀의 몸동작에 따라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전설로 남았죠. 드레스로 캐릭터가 갖는 성격을 9할 이상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심플하면서 우아하며 관능적이기까지 한 드레스는 실비아 그 자체를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여성상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중 닿을 수 없는 스타의 상징인 실비아는 남성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관능의 여신 같은 모습으로 묘사가 됩니다. 하여 의상 또한 이에 맞게 벨벳에 실크, 모피.. 이 관능의 앙상블이 주를 이루죠.


두 번의 아카데미 의상상에 빛나는 건축가이자 세트 디자이너, 영화 의상 디자이너로 이탈리아 영화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Piero Gherardi는 '달콤한 인생'에서 선보인 퇴폐적인 우아함으로 그 첫 번째 의상상을 수상했습니다.


실비아의 의상 중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상으로 그녀가 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입은 사제복 스타일 원피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와 다소 상반된 이미지의 이 의상은 원래 로마의 유명한 세 자매 디자이너 ‘Sorelle Fontana(폰타나 자매)’의 56-57 겨울 컬렉션 ‘linea Cardinale’ 중 ‘Il pretino(The little priest)’로 명명된 작품으로, 이미 헐리웃 여배우 Ava Gardner (에바 가드너)가 구입하면서 한차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의상이었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폰타나 자매가 바티칸의 승인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 원피스에서 감독 Fellini는 묘한 관능미를 느꼈는지 의상감독 Gherardi에게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고, 그는 실비아를 위해 좀 더 심플하지만 라인이 살아있는 스타일의 원피스로 완성합니다.


하지만 이 드레스의 본래 주인인 에바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타가 영화 속에서 이 원피스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바로 디자이너 Micol Fontana에게 항의 섞인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폰타나 자매는 이 오마주 된 영화 속 의상과는 관계가 없었기에 에바 가드너에게 별달리 해줄 말은 없었다죠.




폰타나 자매는 초기 이탈리아 패션을 이끌어간 선구자들 중 하나로, 앞서 소개했던 Giorgini의 ‘13 사도’에 포함되었던 패션 하우스입니다. 로마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중 때마침 로마로 몰려든 영화 배급사들로 인해 배우들이 그녀들의 패션 하우스에 드나들기 시작하며 명성을 쌓아갔고, 특히 1949년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초 본드걸 Linda Christian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해주며 국내외로 큰 주목을 받았죠. 이후 Ava Gardner, Rita Haywort, Liz Taylor, Audrey Hepburn, Kim Novak 같은 헐리웃 배우들의 의상과 영화 의상을 디자인하거나 Jacqueline Kenney의 의상이나 미국 대통령 딸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더욱 이름을 떨쳤습니다.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Google Images

Cinecittà Archiv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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