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relle Fontana, Zoe; Micol; Giovanna
우리의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바늘입니다
- Micol Fontana
이탈리아 패션의 아버지 ‘지오르지니’가 이탈리아를 세계에 알린 패션쇼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디자이너는 바로 ‘폰타나 자매; Sorelle Fontana - Zoe, Micol, Giovanna’였습니다. 사실 지오르지니의 계획은 폰타나 자매가 수락하지 않았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을 만큼 그녀들의 영향력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백지상태에서 세운 계획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로 함께 할 디자이너가 누구인지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죠. 그래야 다른 디자이너들의 참여를 수월하게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미 미국에서 유명했던 폰타나 자매였기에 미국에서 온 손님들은 그녀들의 쇼를 보기 위해 초대에 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Made in Italy의 시작, 폰타나 자매
폰타나 자매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작은 마을 트라베르톨로에서 증조할머니부터 어머니로 이어온 양장점집의 세 자매였습니다. 도구를 쥘 수 있는 나이부터 소녀들의 놀이터는 양장점이었고, 초등교육을 마친 후에는 '공부가 너무 큰 사치였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어머니 양장점의 견습생이 되어 가정을 위해 봉사했죠. 의복 제작뿐 아니라 자수와 장식공예 기술까지 배우는 엄격하고도 고된 작업에 친구들과 놀 시간도, 휴일도 없었습니다.
양장점은 어머니에 의해 엄격한 프로이센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일정은 새벽부터 시작되어 저녁 식사 후,
다시 저녁일을 하기 전 몇 시간 동안만 외출을 허락받았습니다.
자매들은 훌륭한 재단사로 성장했습니다. 도전 정신이 강했던 맏언니 조에는 22살에 동네 청년과 결혼 후 함께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의 오뜨 꾸튀르를 배웠지만, 프랑스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고 2년 후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조에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고자 하죠. 항상 '중요한 일을 하려면 더 큰 도시로 가야 한다'라 생각해 왔던 조에는 대도시인 로마와 밀라노 중 한 도시로 진출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쉽사리 정하지 못했죠. 하여 운명에 맡기기로 합니다. 조에는 남편과 함께 짐을 싸들고 기차역으로 가 먼저 오는 기차가 데려다주는 곳을 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부부 앞에 선 기차는 로마로 향하는 기차였습니다.
조에는 로마에 입성 후 차례로 동생들을 불러들였고, 매우 가족적인 이탈리아인들답게 순서대로 로마에 합류했습니다. 부모님 또한 딸들의 미래를 위해 고향의 오래된 양장점을 정리하고 로마 근교로 이사해 딸들을 도왔습니다. 부모님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어머니는 항상 고향의 전통음식을 차려 자매들을 격려했고, 자매들은 함께 모여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면서 고향의 심한 사투리로 패션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언제나 뿌리를 잊지 않았고 '가족이 함께인 것'은 그들의 힘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 유난히 가족 패션기업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죠. 폰타나 가족은 모두 뭉쳐 세 자매의 꿈인 '아뜰리에'를 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매들에겐 타고난 재능과 어릴 적부터 갈고닦은 숙련된 기술이 있었지만, 당장 대도시 로마에 자신들만의 아뜰리에를 차릴 금전적 여유는 없었습니다. 자매들은 각자 일을 하며 자금을 모았죠. 조에와 미콜은 당시 로마의 라이벌 양장점에 각각 취직하여 엘리트 고객들을 위해 일하며 양장 기술을 더 발전시킬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미 고급기술과 능력을 갖춘 자매는 단번에 최상류 층을 위한 의상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조에는 당시 이탈리아 왕비였던 엘레나 왕비를 고객으로 두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쌓았던 인맥은 그녀들이 아뜰리에를 열었을 때 다른 유명 고객들을 데리고 와주는 귀중한 재산이 되었죠.
자매들의 강점은 화려하고도 정교한 이브닝드레스였습니다. 전쟁 중에도 쉬지 않고 활동한 세 자매가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운 아뜰리에를 연 것은 전쟁의 끝자락인 1943년이었습니다.
폰타나 자매의 아뜰리에: Sorelle Fontana
로마에 첫 번째 아뜰리에를 열었을 때,
우리는 여전히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쉬운 길은 없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빈곤을 겪으며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던 폰타나 자매들이 로마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제2차 대전이 터졌고, 삶은 또다시 생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일 점령군이 로마를 장악한 뒤 더욱 힘들어진 환경에 일자리가 없어진 자매들은 낙담하는 대신 과감한 도전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보통은 하던 활동도 멈춰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역시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다른 구석이 있어야 하나 봅니다. 자매들은 로마의 중심 베네토 거리의 아파트를 임대해 작업실로 꾸며 전쟁 중에도 굴하지 않고 작품활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땐 암시장에서 아름답게 수놓은 직물을 닭고기나 감자로 교환하며 버텼습니다.
세 자매는 서로 잘하는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가장 창의적이었던 조에는 트렌드를 파악하여 디자인에 반영했고, 가족들에게 애칭이 '비둘기'였던 둘째 미콜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언론과 친하게 지내며 홍보를 담당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며 'Sorelle Fontana'의 미국진출을 이끌어내 진정한 글로벌 브랜드로 키웠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셋째 죠반나는 재단사들을 관리 감독하며 재정적인 부분까지 담당하는 등 뒤를 받쳐주었습니다.
물론 드레스 제작은 함께였습니다. 미콜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조에가 재단하고 죠반나는 전체적인 비율을 맞춰 제작했죠. 아뜰리에는 인맥과 입소문으로 서서히 입지를 굳혔으며 로마 귀족 여성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강점은 바로 '장인 정신'이었습니다. 자수와 레이스 그리고 완벽한 재단이 그들의 의복의 특징으로, 특히 그녀들은 기존의 원단을 그대로 쓰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매들의 자수와 레이스의 세련된 장식 기술로 새로이 가공되어 재탄생된 직물은 오뜨 꾸튀르의 정신 그 자체였죠. 비록, 디자인은 유행에 따라 프랑스 스타일을 참고했지만 직물만큼은 그들의 창의적인 산물이었습니다. 특히 완벽한 재단 기술과 정교한 장식으로 웨딩드레스 분야에 강점을 보였죠. 폰타나 자매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것은 당시 이탈리아 예비신부들의 꿈이었습니다.
여성이 우아해지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었습니다
패션에서의 탈 프랑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바로 이 전쟁은 이탈리아 패션을 드디어 프랑스 패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가 그렇게 고대하던 패션에서의 탈 프랑스가 실제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 유럽 내의 전시상황 -2차 세계대전- 으로 교류가 멈췄고 프랑스 패션을 더 이상 따라 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이 시기 폰나타 자매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들은 독자적인 디자인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잠시동안이었지만 자립의 경험은 곧이어 진짜 행해질 탈 프랑스의 성공을 가늠케 했습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파시스트당이 펼쳤던 국가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패션은 여전히 이탈리아 패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취향과 상관없이 유행을 포기하지 않았죠. 여전히 패션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전쟁 후에도 단번에 프랑스를 끊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교류가 다시 시작되자 사람들은 여전히 프랑스 패션을 선호하며 찾았죠. 1947년 발표된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은 전쟁 이후 패션의 정석이 되어 서양 여인들의 스타일을 지배했고, 폰타나 자매 또한 '뉴룩'의 실루엣에 이탈리아 직물로 만든 드레스를 선보이며 로마의 상류층 사회를 휘어잡았습니다.
이탈리아 내에서 뿐만아니라 해외의 고객들에게도 당시 이탈리아는 그저 '프랑스 패션을 좀 더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콧대 높은 프랑스의 의복은 비싸도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폰타나 자매의 의상은 크리스찬 디올의 약 1/3의 가격이면 구입이 가능했죠. 비슷한 디자인에 품질 또한 별반 다를 게 없는 제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바로 옆동네에서 살 수 있다면, 굳이 '메이드 인 프랑스'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비록 모방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이는 디자인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탈리아만의 스타일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정세도 이탈리아에 유리하게끔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