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와 패션
기차가 데려다준 '로마'는 옳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죠.
시네치타와 마셜플랜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는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영화'와 '패션'
전쟁 전,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은 정부 프로젝트로 1937년 로마에 '시네치타: Cinecittà'라는 영화 스튜디오를 설립했고, 이탈리아의 영화인들은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제작되면서 세계적인 영화관계자들은 로마를 안방 드나들 듯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국부의 1/3이 파괴되었지만, 미국의 원조를 받아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이탈리아를 자본주의 영향력 아래로 유지시키기 위해 마셜 플랜*을 도입했고, 미국의 영화제작자들은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아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파시스트 정부가 구축해 놓은 영화 인프라였던 시네치타는 전쟁 중 큰 피해를 입었으나, 미국 기업과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으로 재건축되어 최소 12편의 영화를 동시에 제작할 수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로 발돋움하죠. 이탈리아라는 매력적이고도 새로운 환경 -게다가 영화 제작 역량까지 뛰어난- 에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는 미국관객을 사로잡았고 막대한 흥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 - 2차 세계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 동맹국을 위한 미국의 '유럽 부흥 계획'. 냉전시대에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아래 미국이 실시한 대규모 경제 원조.
자연스레 로마는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고, 로마의 여러 패션 아뜰리에는 할리우드 디바들이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패션리더는 더 이상 왕족이나 귀족들이 아닌 할리우드의 배우들이었습니다. 1950년대의 신문과 잡지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패션이 장악했고, 사람들은 쉽고 빠르게 그들의 패션을 따라 했죠.
하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패션은 그저 이탈리아만의 것이었습니다. 미국 패션 잡지 ‘보그: Vogue’의 1947년 1월호에는 ‘Sorelle Fontana’에 대해 자매와 관련된 이미지도 없이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양장점 중 하나'라는 짧은 언급만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스타; 스타마케팅의 시작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알아서 걸어 들어왔습니다. 초대 '본드 걸'로 유명했던 린다 크리스티안이었습니다. 할리우드의 스타 타이론 파워와 결혼을 앞둔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폰타나 자매에게 의뢰하기 위해 아틀리에로 찾아온 것이었죠. 인맥으로 이어진 행운이었습니다. 린다는 이탈리아로 망명한 러시아계 공주였던 아이린 갈리친 -폰타나 자매의 고객이면서 자신도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한- 의 추천으로 폰타나 자매를 선택했습니다.
폰타나 자매가 린다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문만으로 미국은 폰타나 자매의 아틀리에를 주목했고, 이제 언론은 그녀들을 '로마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로 부르기 시작했죠. 스타 마케팅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미국의 출판물들은 알아서 폰타나 자매의 의상 이미지를 실어주기 시작했고, 어떻게 로마가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의 주요 목적지가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로마의 유명 패션 아틀리에는 할리우드의 디바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으며, 이 시기 새로 나타난 집단인 파파라치들은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명성을 떨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할리우드 배우들을 쫓아다니던 그들은 배우들이 아틀리에를 방문하고 나오는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찍었고, 신문과 잡지에 스타들이 방문한 상호명이 담긴 수많은 사진들이 실리면서 가만있어도 알아서 홍보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죠. 언론의 지속적인 노출로 자연스레 미국 내에서 '이탈리아'의 존재감은 커져갔습니다. 이제 대세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옮겨온 듯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행운이게도 전쟁기간 동안 미국인들에게는 '프랑스 제품은 나치화되었다'라는 이미지가 심어져 프랑스 제품을 꺼려했고, 전쟁 후에는 여전한 프랑스 제품의 높은 가격에 거부감을 느끼며 새로운 시장*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매우 준비된 후보였던 이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꿰챴죠.
* 1-2차 세계대전동안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유럽 패션의 커다란 소비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로마의 한 대성당에서 결혼하기로 한 할리우드을 대표하는 두 배우의 결정에 이탈리아는 들떴습니다. 언론은 세기의 결혼식이라 떠들어댔고, 린다가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죠. 이러한 상황에 린다가 '폰타나 자매'를 선택하면서 자매들의 작품은 본격적으로 국제시장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게 된 것입니다.
웨딩드레스는 미국잡지 '라이프: Life'의 표지에 실리며 독점 보도되었고, 결혼식 다음날에는 세계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오뜨 꾸뛰르' 작품 사진이 세계적으로 퍼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 회화에서 영감을 얻어 재단된 드레스는 새틴 위에 폰타나 자매들의 강점인 섬세한 자수가 놓아진 우아하고 고전적인 스타일로, 레이스 위로 진주와 베네치아의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은 매우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파파라치들은 드레스를 사진에 담기 위해 신부가 결혼식장으로 출발하기도 전부터 모여들어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아슬아슬 건물 벽을 타고 올라서 한 장이라도 찍겠다는 당시 파파라치의 위험한 포즈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당시 약 1만 명의 팬들이 몰려 결혼식이 거행되는 성당 주변을 가득 매웠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뒤 이들은 교황 비오 12세까지 알현하며, 결혼식이 진정한 세계적인 이벤트임을 증명해 보였죠.
결혼식 이후 폰타나 자매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폰타나 자매의 성공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타마케팅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자매의 아틀리에는 홍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없이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배우들과 재클린 케네디, 소라야 여왕 등 유명인들이 즐겨 찾는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가 되었죠. 스타들도 가장 핫한 아틀리에의 의상을 그 당시에 입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명성과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의상을 의뢰했습니다. 이는 디자이너와 스타들의 윈윈 전략이었습니다.
'장인 정신'이라는 기술적인 강점 외에 폰타나 자매들의 또 하나의 강점은 '친밀감'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고객들과의 돈독한 우정을 쌓기로 유명했는데, 외로운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옆집언니와 같이 친근하게 대해주는 이탈리아 자매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친분을 쌓은 할리우드 배우들은 자매를 미국으로 초대해 미국시장의 진출을 도왔고, 미콜은 린다 크리스천과 타이론 부부 아이의 대모를 서주기도 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미콜과 친했던 에바 가드너는 멕시코의 촬영장에 그녀를 초대하고 직접 요리까지 해주는 등 각별한 친구로 지냈고, 여러 영화에서 폰타나 자매의 의상을 입고 연기했습니다.
이탈리아 최초의 공식 패션쇼
'이탈리아 패션으로 세계를 정복'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이탈리아 패션의 아버지 지오르지니: Giovanni B. Giorgini는 폰타나 자매에게 패션쇼 참여를 제안하며 한 가지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프랑스 스타일을 버릴 것!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참고하여 옷을 만들던 폰타나 자매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이미 큰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익숙한 시스템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자매들끼리도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고심했지만, 결국 '한 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공통적인 마음으로 그들은 전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로써 지오르지니의 계획은 첫발을 내딛게 되었죠.
이 시기가 바로 이탈리아 패션이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탈리아적인 게 무엇인지부터 고민해봐야 했죠.
1951년, 이탈리아의 기성복 패션은 성공적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고,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지는 'Made in Italy'가 탄생되었습니다. Sorelle Fontana의 라벨에도 한쪽 구석에 'Made in Italy'가 새겨졌습니다. 패션쇼 이후 성장을 거듭한 폰타나 자매의 아뜰리에는 디자이너를 비롯한 재단사, 자수공 등 400여 명의 직원이 고용된 거대한 패션하우스가 되죠. 폰타나 자매는 명실상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1972년 패션쇼에서 은퇴했습니다.
패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콜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