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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Feb 04. 2019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  그 승리의 전략


 그 승리의 전략 : Il Fascismo e La Moda


이탈리아 패션,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탄생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이탈리아 패션의 첫 시작이었던 미래주의는 때마침 맞물려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폐쇄적인 파시즘 덕분에 알려진 자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폐쇄적인 성격의 파시즘이 이탈리아 패션 탄생을 위한 또 하나의 배경이 되어주죠.


거기에는 한 명의 강력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절대독재자 베니또 무쏠리니(Benito A. A. Mussolini)입니다.





강하고 힘 있는 새로운 이탈리아를 원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수장 무쏠리니는 당시 외국 패션을 따라하는 자국민들이 못마땅했고, 대대적으로 이탈리아 패션-가구, 장식, 의복 등-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는 외래어를 쓰는 것조차 싫어해 이탈리아어로 다 바꿔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유행했던 ‘미키마우스’를 미키마우스라 부르지 않고 ‘Topolino(또뽈리노)’라고 불렀죠. 이러한 현상은 아직까지 남아있어 ‘뽀로로’가 이 곳에선 ‘Pinguino(핑귀노)’, 즉 그냥 펭귄으로 불립니다.



L’ITALIA FARA’DA SE’: 자급자족 프로젝트


파시즘 정권은 ‘모든 것은 이탈리아로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것들만 소비해야 했습니다. 정부차원에서 ’이탈리아 제품을 사라(Acquistate Prodotti Italiani!)’는 선전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죠.

..사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정부는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통제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옆 나라 프랑스 패션이 아주 맘에 안 들던 무쏠리니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Una moda italiana nel vestiario (..) crearla è possibile, bisogna crearla” (이탈리아 패션은 (...) 창조할 수 있으며, 창조해야 한다)라며 이탈리아 패션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1933년 4월에 '첫 번째 국가 패션 전시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는 Elena왕비가 몸소 행차해 이탈리아 패션의 시작을 축하할 정도로 큰 국가적인 행사였습니다. 장소는 북부에 위치한 토리노(Torino)였죠.


Mostra Nazionale della Moda, Torino, 1933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쿨하고 쉬크한 최첨단 디스플레이로 구성된 전시회는, 마네킨들이 자동으로 회전했고 중간중간 실제 모델들이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하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으며, 관계자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등장해 디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TV에서 방영된 전시회에 관한 영상 첫 번째 화면에 나오는 글이 인상적입니다. 정말 독재스러운 확실한 지침이죠. 당시 토리노는 이탈리아에서 한 우아한다는 모든 여성들이 몰려들던 곳으로 이미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동네였고, 다양한 패션 이벤트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많은 이들에게 시각적 충격을 던져주었던 사건도 있었으니..



1911년 3월 31일 오후 7시경. 토리노의 광장 한복판에 바지를 입은 여성이 등장한 것이었죠. 주변은 경악과 소란으로 가득 찼고, 이러한 난리통 속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폴 뿌아레(Paul Poiret)’의 바지를 입은 이 패션의 선구자는 주변의 향수 가게로 숨어야 했으며.. 상황이 잠잠해진 뒤에야 상점의 뒷문을 통해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이탈리아에서 처음 여성이 바지를 입은 상징적인 스캔들이었죠.


같은 해 4월에는 국제 박람회도 열렸습니다. 많은 전시품들 사이로 아름다운 건물 ‘Pabiglione della Moda’에서 열린 의상 전시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류층 사회를 잘 반영해 보여주었습니다. 1933년 4월 첫 자국 패션 전시회에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도 열립니다. 당시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 등지에서 활동하던 재단사들이 참여해 작품을 발표했고, 이후 연중행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Esposizione Internazionale, Torino, 1911


사실 당시의 토리노는 작은 프랑스였습니다. 토리노의 재단사들은 그 탄생부터 파리의 패션 하우스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 잡지를 봤으며, 파리 패션쇼의 최신 디자인을 공유했죠. 이러한 현상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랑거리였죠.


프랑스 패션 말살정책이었을까요? 아니면 환경이 이미 잘 갖춰진 동네였기 때문일까요? 이런 토리노에 무쏠리니 정권은 이탈리아 패션을 창조하겠다며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기획 착수합니다. 국가적으로 모든 의류 산업 분야를 관리 감독하기 위한 목적이었죠.


1935년 10월 31일 토리노에 국립 패션 기관인 ‘l'Ente Nazionale della Moda’를 설립해 이탈리아 패션, 그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파시즘 정권이 토리노를 ‘Città di Moda(패션의 도시)’로 선정한 건 세 가지 이유였습니다. 1. 왕실의 지지가 있었고, 2. 토리노는 일찍이 산업이 발달된 도시로 이탈리아 북부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3. 우아함과 패션에 대한 오랜 전통을 지닌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토리노는 프랑스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유행이 가장 먼저 퍼졌고, 자연스레 당시의 재능 있고 훌륭한 장인들이 모여들어 재능을 펼쳤으며, 이들을 뒷받침해줄 부유한 고객들이 넘쳐났었죠. 이렇게 토리노는 새로운 패션의 도시 밀라노가 부상하기 전(1990년대까지)까지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패션 수도였습니다.



기관은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로 그 시작부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자국에서 생산된 재료를 써야 한다는 류의 관련 법 조항이 생겨났고 패션 관련 회사나 하우스는 기관에 등록해야 했으며, 300여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재단사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에 들어갔죠. 각 브랜드나 패션 하우스들은 자기돈 들여가며 모든 품목의 모델 사진을 찍고 원단샘플을 달아 기관에 제출해야 했으며, 기관에서 주는 ‘보증 마크’를 또 돈을 주면서 받아와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되고 만들어졌다는 증표인 이 마크를 꼭 달아야 했지요.


1936년에는 당시 통용되었던 외국어로 된 패션 용어(프랑스어, 영어)들을 모두 이탈리아어로 바꿔 500장이나 되는 사전도 출판합니다. 이러한 용어들은 아직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패션 전공 수업 중 다시 외국어로 된 용어를 배우는 과정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이탈리아 패션은 ‘Dea‘, ‘Fantasie d‘Italia’, ‘Lidel’ 같은 잡지들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멋진 이미지와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여인들에게 자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이었죠.    



그중 파시즘 정권의 열렬한 추종자 ‘리디아(Lydia Dosio De Liguoro)’에 의해 1919년 창간된 ‘Lidel’은 파시즘의 끝자락과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 정권이 원하는 패션 스타일을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리디아는 ‘Fantasie d’Italia(Fantasies of Italy)’의 디렉터로도 활동한, 패션분야의 파시즘 나팔수 정도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온갖 사치품들의 향연으로 꾸며진 이 잡지는 엘리트 여성을 대상으로 세련되고 우아한 수준 높은 생활상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여성들이 지향해야 할 스타일에 대한 지침을 내려주었습니다. 국수주의에 심취해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었죠.


이 잡지를 통해 패션을 전공한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간단한 선만으로 여성의 우아함을 극적으로 표현해냈던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르네 그뤼오(René Gruau)’가 일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르네는 자신이 한 Dior 광고의 일러스트로도 유명하죠.




1950년 11에는 첫 국제 의류 시장인 ‘SAMIA’가 만들어졌으며, 그 첫 활동으로 1955년 기성복 시장 ‘Mostra Mercato di Moda’가 토리노에서 열립니다.


첫 여성 하이패션 디자이너로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를 고객으로 두었던 밀라노 출신 디자이너 ‘Biki’, 또 다른 이탈리아 하이패션의 선구자 ‘Jole Veneziani’, 로마의 세 자매 디자이너 ‘Le Sorelle Fontana’ 등 당대 최고로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을 모아 모아 해외 시장을 겨냥해 만든 마켓이었죠. SAMIA는 국제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고,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의류 행사로 자리매김하며 1977년 문 닫기 전까지 성공적으로 이탈리아 패션을 이끌었습니다.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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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ituto L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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